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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인종주의의 특징

등록 :2015-02-17 19:15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한국 대학이 ‘오로지 백인’에게 집착하는 데는 깊은 문화·세계관적 원인이 있다. 한국서 비공식적으로 거의 제도화된 차별적 대외관이 그것이다. 세계를 하나의 큰 위계질서로 파악하는 이 대외관은 서구발 인종주의의 단순한 ‘번역’에 국한하지 않는다.

언어(즉, 영어 구사력)나 종교 등 타자의 상징자본과 특히 타자의 경제력에 대한 서열적 평가가 늘 결합해 매우 복잡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타자들에 적용되는 서열은 내부 서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며칠 전에 우연히 한 일본 대학의 영문 소개 책자를 봤다. 그 대학에서 공부하는 유학생들의 대부분은 한국인과 중국인 등 이웃 나라에서 온 아시아인들이다. 한데 책자의 사진에서는 일본인 학생들 이외에는 “아시아적으로” 생긴 얼굴들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책자 모델로 호출된 외국인 유학생들은 전원 백인들이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런 관행은 일본 대학가에서 흔하다. 실제 일본에서 공부하는 약 13만명의 외국인 중에서 아시아 출신들은 92%로 절대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국(62%)이나 한국(12%)에서 온다. ‘하얀 나라’에서 온 학생들 비율은 약 4%에 불과하며 그들 중에서도 상당 부분은 아시아계 학생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본 대학마다 ‘백인 학생들 모시기’에 안간힘을 써가면서 안내 책자에서 아시아 학생들을 ‘노출’시키는 것을 꺼린다. ‘중국인이 몰려오는 학교’라는 인상이 강해지면 그 학교의 ‘위상’을 상징해야 하는 ‘백인’들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공포감 때문이란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역시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서 유럽 열강처럼 되자)를 비공식적 국시로 삼아온 일본다운 치사함이라고 치부하고 저들의 인종주의의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와는 과연 무슨 관계인가 싶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 식민지 시대 친일관료군을 계승한 엘리트에 의해서 지배돼온 국가인 만큼, 일본이 지니는 병리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실은, 그 일본 대학의 책자를 보는 순간, 나의 머리에 뜬 용어는 ‘백인 프로젝트’였다. 내가 방문한 국내의 한 대학에서 대외교류 책임자들이 사석에서 써온 용어였는데, 그 뜻은 ‘학교 위상 제고 차원에서 파격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백인 유학생 유치에 힘쓰자’는 것이었다. 외부자인 나에게 이런 ‘프로젝트’의 대강을 아무 거리낌없이 설명하는 태도로 봐서는, 그들은 이와 같은 용어의 사용이 국제적으로 범죄로 인식되는 인종주의에 해당된다는 사실 자체를 거의 인식하지 않았다. 실은, 한국의 외국인 유학생 현황은 일본과 대략 비슷하다. 전체 약 8만6000명의 외국인 대학생 중에서 아시아 출신들은 7만6000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유럽 출신들은 약 4000명에 불과한데다가 그 다수는 단기 (주로 어학) 연수생들이다. 여러 가지 역사·문화적 이유로 일본·한국에서 생산되는 지식을 가장 잘 수입할 나라들은 바로 중국과 베트남 등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이나 그 인접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대학 행정가들이 ‘학교 위신 제고’를 운운하면서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백인 모시기’에 올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근인과 원인을 구별해서 말해야 하겠다. 근인을 이야기하자면 김대중 정권 이후로 역대 정권들의 변함없는 대외 예속적 학술·교육 정책을 꼽아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하는 그 정책은 학술·교육을 상품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대학 학위도 학술 논문도 휴대폰과 다를 게 없는 상품이라면, 그 상품들을 구매력이 가장 센 잠재적 구매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의 언어 등의 기준에 맞추어서 만들어 팔아야 한다. 중국 대학마저도 영어논문의 게재에 포상금을 주는 만큼 영미권 학술 시장이 가장 큰 것으로 인식되기에 한국 대학들에서도 불도저식으로 영어 강의를 강행하고 학교와 연구소를 영어논문제작소로 만드는 게 신자유주의자로서는 당연한 결정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면, 교육과 특히 인문사회학 같은 학문을 상품이 아닌 인간의 계발, 자기실현의 도구로 생각할 것이고, 그 나라의 교육과 인문사회학은 그 나라 주민 다수를 위해서 존재하고 다수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겠지만, 대부분이 미국에서 받은 학위를 주된 상징자본으로 내세우는 한국의 교육·학술정책 담당자들은 이런 비판을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학술언어로서의 한국어가 말살되고 학술·교육의 영어화가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영어 구사력이 좋다는 구미권 유학생들에게 우선순위를 두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결국 한국의 지배자인 강남족들이 원하는 풍경은,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대학의 강의실에서 구미권 출신이나 미국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진 한국계 교수가 구미권 출신과 한국 지배층 출신이 반반인 학생들에게 ‘네이티브’(원어민 같은) 발음으로 영어 강의하며, 그 과정에서 한국 지배계급의 다음 세대가 굳이 유학 가지 않아도 충분히 미국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대부분의 고등교육이 ‘내지어’(일본어)로 이루어진 것까지 염두에 두면, 식민지 지배계층과 불가분의 역사적 관계를 지니는 오늘날 한국 지배층의 이런 구상의 계보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저들에게 단순히 새로운 ‘내지어’(즉, 영어)를 잘하는 많은 외국인들만이 필요하다면, 유학생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 등을 차별할 이유도 없다. 그들의 영어 구사력은 많은 경우 한국인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이외에는 인도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여러 아시아 국가 출신의 유학생들은 영어를 평균적 한국인에 비해 잘한다. 그들을 차별하면서 ‘오로지 백인’에게 집착하는 데에는 보다 더 깊은 문화·세계관적 원인이 있다. 이 원인은 바로 한국에서 비공식적으로 거의 제도화된 차별적 대외관에 있다. 전세계를 하나의 커다란 위계질서로 파악하는 이 대외관은 <서유견문>(1895) 등 구미권과 일본의 ‘문명의 서열’ 개념을 국내로 도입한 개화기의 서적부터 그 계보를 추적할 수 있지만, 결코 서구발 인종주의의 단순한 ‘번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언어(즉, 영어 구사력)나 종교 등 타자의 상징자본과 특히 타자의 경제력에 대한 서열적 평가도 늘 결합해 매우 복잡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룬다. 이와 같은 서열적 대외관 형성에 당연하게도 작용한 것은 한국의 국시 격인 성장제일주의나 국내에서 팽배한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영어 구사력이 매개가 돼 매겨지는 국내에서의 상징자본의 서열 등이다. 결국 타자들에게 적용되는 서열은 내부 서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식민지 엘리트에 의해서 건국되고 통치돼온 나라인 만큼 한국의 인종주의는 자민족 위주도 아니다. 철저하게 백인 숭배식이다. 이 현상을 가장 통감하는 사람들은, 고국에 돌아와도 같은 미국이나 캐나다 국적의 백인에 비해 늘 홀대당하고 우선순위에서 밀려야 하는 북미 거주의 한인 교민들이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백인 숭배와 제도화된 혈통주의가 얼마든지 공존공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 관련의 법률상 ‘해외동포’와 일반 외국인들은 차별적 대우를 받으며, 전자의 경우에는 체류연장이나 영주권 신청 등이 비교적 더 쉽다. 대중의 의식에서도 보통 혈연적 관련성이 없는 외국인에 비해서는 ‘동포’에 대한 친밀감은 훨씬 더 짙은 것으로 나타난다. 아직까지도 ‘동포’는 ‘한민족 대가족’의 일원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비공식적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서열에서는 이 ‘가족’들보다 백인이 더 높은 지위를 점한다는 것은 대부분 한국인 대외관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단순한 백인 숭배와 비백인 천시로 한국형 인종주의가 끝나지도 않는다. 피부색과 무관하게 동유럽 ‘못사는 나라’ 출신들은 수모를 겪어야 하는가 하면 예컨대 영국 시민권을 가진 부유한 인도 출신의 2세 이민자는 그 경제력이나 영어 구사력만큼의 ‘대우’를 받게 된다. 종교의 비공식적 서열도 한몫을 해서 예컨대 같은 ‘비백인이지만 부자 나라’인 싱가포르 출신이라 해도 기독교인인 화교 출신은 이슬람교도인 말레이족 출신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게 된다. 천차만별의 다면적 차별구도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차별이 일상화·체질화돼 있는 사회는 행복할 리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다문화를 지향하자면 우리 마음 안에서의 ‘백인병(病)’이나 ‘못사는 나라’를 우리 밑으로 보려는 성장제일주의부터 치료·극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내인들을 획일적으로 줄세우는 경제력·상징자본의 위계질서부터 먼저 타파돼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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