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이주노동자 23만명 시대. 한국인들이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고(3D) 피하는 일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는 이주노동자들. 그들을 빼고 한국의 산업을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노동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정작 속내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 기획에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아닌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담아본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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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외국인 학교 우린토야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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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린토야뎀베렐도리지입니다. 이름 길죠? 성인 뎀베렐도리지는 아버지 이름이고, 도리지는 티벳말인데 뜻은 잘 모르지만 좋은 말이래요. 몽골사람들 티벳불교 많이 믿어서 티벳 이름 많이 쓰거든요. 사람들이 몽골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너 말 잘 타겠다. 천막(게르)에서 사니? 낙타도 키우니? 그렇게 물어봐요. 저는 울란바토르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방송의 영향인 것 같아요. 울란바토르 외곽에는 게르촌이 있긴 하지만 TV에  나오는 것처럼 들판에서 말타고 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아요."

몽골. 엉덩이에 몽고반점을 도장처럼 지니고 태어난 우리에게 몽골이라는 나라는 낯설지 않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로 잘 알려진 것처럼 이미 고려시대 왕가의 결혼을 통해 그 핏줄이 우리에게 흘러들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때 세계를 말발굽 아래 호령했던 위대한 왕 칭기즈칸의 나라. 하지만 손자 쿠빌라이칸이 명나라에 멸망한 이후 변방으로 쫓겨나 1924년 독립을 선언할 때까지 초라한 소수민족의 길을 걸어왔다.

"몽골 사람들은 설날인 차강사르와 독립기념일인 나담축제를 가장 큰 명절로 여겨요. 설날은 음력으로 지내서 한국과 비슷하구요, 음식을 많이 해서 가족이나 이웃과 나누고 세배도 하고... 한국하고 비슷해요. 나담 축제는 7월인데 몽골사람이면 누구나 기다리는 가장 큰 축제예요. 한국에도 방송에 많이 나왔어요."

현재 몽골의 인구는 대략 300만명. 한국에 들어온 몽골인을 많게 잡아 3만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몽골 인구의 약 1%가 한국에 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들 중 많은 수가 불법노동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젖먹이 딸 떼어놓고 한국에 처음 온 지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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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외국인 학교의 화학선생님. 우린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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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08년 학생비자로 한국에 왔어요. 남편이 몇 달 먼저 숭실대에 유학을 왔고 저도 삼개월 뒤 남편을 따라 왔지요. 딸이 1살이었는데 엄마한테 맡겨놓고 한국에 나왔어요. 젖이 마르지 않아서 젖먹일 때가 되면 젖이 막 흐르고 그랬지요. 그럴 때 많이 울었어요. 딸보고 싶은 생각을 잊으려고 새벽부터 밤을 새워서 공부했어요."

우린토야씨는 서울 광장동에 위치한 재한몽골인학교 7학년 화학 선생님이다. 스물네 살에 한국에 들어와 서른한 살이 되었으니 어느새 한국생활 8년차. 대부분은 학생 신분이었지만 때때로 그녀도 노동자였다. 적은 연구원 월급으로 생활하다보니 가끔씩 학생 신분을 숨기고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남편과 둘이 학교 근처 고시원에 살았어요. 창문도 없고 한 사람이 서 있으면 한사람은 침대 위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 그런 작은 방이요. 2010년에 딸을 데려오면서 학교 근처로 이사를 했어요. 그러다보니 돈이 많이 들더라구요. 남편과 내가 받은 연구비로 방세 내고 딸 어린이집 보내고 먹고 살려니 늘 돈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휴일에 일을 했지요. 청소일도 하고 식당일도 나가고 통역도 하고 동대문에서 보조 일도 했어요. 그러다보니 같은 몽골 이주노동자들도 많이 알게 되었구요."

그녀는 비록 유학생 신분으로 잠깐 아르바이트한 정도였지만, 알고 지내던 다른 몽골 이주노동자들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때 경험해 봐서 학부모님(몽골 이주노동자들)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제가 잘 알아요. 저는 하루 이틀 일하면 그만이었지만 부모님들은 돈을 벌려면 계속 그런 일을 겪어야 하잖아요. 그 중에도 불법체류 중인 노동자는 더 힘들어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 할 수 없으니까요. 월급을 못 받거나 일하는 중에 싸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겨도 불법노동자라 하소연도 못하고 고스란히 피해를 당하거든요."

우린토야씨는 몽골사람들이 불법노동자의 신분으로라도 강제 출국 당하는 날까지 한국에 남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몽골은 지하자원은 풍부하지만 공장이나 산업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일자리도 없구요. 일자리를 얻는다고 해도 임금이 한국과는 차이가 많아요. 학교선생님의 월급이 40만 원 정도인데 울란바토르 물가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넉넉하게 살기는 어려워요. 시골 게르에 살면 오축(소, 양, 낙타, 말, 염소 등 다섯가지 가축을 말함)을 키우며 자급자족하겠지만 울란바토르는 도심이라 그렇게 살 수도 없어요. 일자리는 없고... 일을 해도 월급이 생활비에 비해 너무 적으니 바깥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지요."

무지개가 뜨는 나라 한국에서 키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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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양,말,낙타,염소 등 다섯가지 가축(오축)의 뼈로 만든 아이들의 놀잇감. 점을 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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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한국 바람이 분 것은 이미 20년 전. 양국 수교와 함께 산업 연수생 제도를 운영하면서 부터 였다. 지금보다 더 현금이 귀했던 당시에 한국에 가서 외화를 벌어온 이웃들의 이야기는 코리안 드림의 불씨가 되었다.

"엄마 친구가 한국에 다녀왔는데 돈을 많이 벌어왔어요. 좋은 한국 물건도 많이 가져왔구요. 그때부터 너도 나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가려고 했어요. 산업연수생 인원이 한정되어 있으니 일단 관광 비자로 한국에 들어갔다가 불법노동자로 주저앉았지요. 지금도 울란바토르 한국대사관 앞은 비자를 받으려는 몽골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있어요. 몽골에서는 오래전부터 한국을 '소롱고스'라고 불렀거든요. 소롱고스는 무지개가 뜨는 곳이라는 뜻이에요. 그 옛날부터 몽골사람들은 한국을 아름다운 나라,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우린토야씨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드라마나 여행 프로 등 방송을 통해 만나는 한국의 모습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충분히 설레게 했다. 

"한국 드라마 <대장금>도 보고 <올인>도 봤어요. 방송에서 본 한국은 정말 굉장히 잘살고 친절하고 멋지고 화려한 나라였어요. 사람들도 모두 잘 생기고 예쁘구요. 우리 학교에 다니는 몽골 학생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자기들도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한국이 잘 사는 사람만 있고 예쁜 여자 멋진 남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와보니 아니더라구요. 어디나 사람 사는 건 비슷하잖아요."

우린토야와 남편은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좀 더 발전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기회였다. 

"몽고 국립대학은 시설이 많이 부족해요. 연구나 실험을 하려면 시약도 필요하고 책도 사야하고 기계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한국은 너무 좋아요. 학교에 연구자료, 실험도구, 시약, 책, 기계 필요한 것이 다 있어요. 없는 것은 필요하다고 하면 학교에서 구입해주세요. 저는 나노입자를 이용한 항암치료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아이 키우면서 공부하기 힘들었지만 스스로도 자랑스러워요."

논문을 쓰며 파트타임 교사로 일했던 우린토야씨는 지난해부터 몽골외국인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친다. 둘째를 출산한 후 육아를 하다 보니 연구원 생활에 무리가 있어 시간적 여유가 있는 교사를 택했다. 

"한국은 아이를 키우기 좋은 나라에요. 지금 한 살인 아들도 어린이집에 맡기고 있고 세 살때 데려온 딸도 한국 어린이 집 아니었으면 이렇게 잘 키우지 못했을 거예요. 원장선생님이 친정 엄마처럼 챙겨주셨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도와 주셨구요. 우리 딸한테도 친할머니처럼 잘 해주셨어요. 우리 딸 어린이집에서 한국말, 한글 다 배우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그랬어요. 지금은 우리 딸이 저보다 한국말 더 잘해요."

"외국인 노동자 아이들이라고 차별 안 했으면... 우리는 모두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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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외국인학교에 전시된 몽고식 전통 체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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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토야씨에게 아이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것 같다고 하니 몽골인들의 가족사랑이 유난한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자녀들도 많다. 우린토야씨가 근무하고 있는 몽골외국인 학교가 설립된 이유도 다르지 않다.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한국에 온 자녀들을 교육의 사각지대에 방치할 수 없다는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  

"산업연수원제도로 시작해 벌써 20년이 넘어가다보니 본국에서도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자녀 문제예요. 부모가 돈을 벌러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 아이들이 방치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다보면 나쁜 길로 가는 아이도 있구요. 누구나 아이를 데리고 있고 싶어해요. 아이들도 부모들의 입장을 알지만 몽골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는 여기 와서 부모와 같이 지내는 걸 더 좋아하구요. 신분이 어떻든 아이들은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부도 해야 하구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동안 우리가 이주노동자 자녀의 문제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문화가정 자녀에게 기울이는 관심의 아주 일부만이라도 이들 외국인노동자 자녀들에게 준다면 어린 아이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일은 없을 텐데.

"여기 학생들 상처가 많아요. 일반학교 다니다가 왕따 많이 겪었구요, 영화에서처럼 화장실에 가둬놓고 물 뿌리기도 하고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발음이 다르니까 친구 안 해주고 왕따시키고 그래요. 그러다보니 학교에 가지 않고 배회하기도 하고 부모님은 저녁에나 밤 늦게 오니 아이들에게 어떤 문제 있는지 알지 못하고..."

우린토야씨가 학교에 근무하며 가장 보람있는 일은 아이들의 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란다. 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무관심과 차별 속에 지내던 아이들이 달라졌다.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와 부모님과의 관계를 회복해가는 아이들을 보며 오히려 선생님인 자신이 더 큰 보람과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기가 많이 죽어있어요. 그래서 뭐든 난 못한다, 할 수 없다, 모른다... 그래요. 그래서 여기서는 몽골 역사를 많이 가르쳐요. 칭기즈칸의 자손이라는 자존감을 가지라구요. 발전된 학문도 가르치지만 점점 사라지는 몽골의 전통도 가르쳐요. 몽골식 명절행사도 하고 몽골음식도 먹고 복장과 놀이같은 것도 잊지 않도록 가르쳐요. 

우리 학교에서 배운 아이들이 언젠가는 몽골에 들어가서 대통령도 될 수 있고 큰 회사의 사장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어찌보면 조기유학 온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지금도 한국에서 공부하고 몽골에 들어간 제 친구나 남편 친구들은 큰 회사도 운영하고, 정부에도 들어가고, 학교에도 들어가서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하고 있어요. 몇 년 후면 우리 학생들도 그럴 거예요. 그때가 되면 우리 학생들이 두 나라를 다 이해하고 잘 협조하는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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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외국인 학교 7학년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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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교실을 둘러보았다. 겨울방학을 마친 학생들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수다가 한창이다. 교실 여기저기에 보이는 몽골글씨가 아니라면 외국인학교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은 익숙한 교실의 모습이다. 

머리색도 피부색도 심지어 광대뼈도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아이들. 저 아이들을 외국인 노동자자녀 혹은 불법노동자의 자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조차 폭력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토야씨 선생님의 당부도 다르지 않았다. 그냥 같은 사람으로, 이웃으로, 형제로, 친구로 대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각자 이유와 사연이 있어서 한국에 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무시당하고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주 노동자, 불법체류자, 다문화가정...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그냥 한 사람으로, 이웃으로, 형제로 보아주시면 좋겠어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한 사람들이니까요. 특히 우리 아이들은 더 예민한 나이니까 관심을 가져주세요. 혹시 같은 학교에 외국인 학생이 있나요? 피부색 다르다고, 말 잘 못한다고 놀리지 말고 친구 되어주세요. 꼭 부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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