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안보이는 난민위기> 동유럽 떠넘기기 급급…"쿼터제 반대"

지난 18일(현지시간) 새벽 헝가리 접경인 크로아티아 동북부의 벨리 마나스티르역에서 난민들이 쉬고 있다. 헝가리가의 국경 통제 강화로 수많은 난민이 크로아티아를 경유하려 했지만 크로아티아 정부마저 쏟아지는 난민 유입에 기존의 입장을 바꿔 세르비아와의 국경 길목을 차단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제비뽑기로 선별 입국도…병목현상에 통로 국가의 난민 주차장화 우려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준억 특파원 = 중동 난민과 이민자들의 기착지인 동유럽 국가들은 난민이 대거 몰려들자 갈팡질팡하며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하고 있다.

난민과 이민자들은 동유럽에서 이 나라 저 나라로 떠밀리고 슬로베니아 국경 앞에서는 제비뽑기로 입국이 허용되자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는 등 국경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서유럽의 문턱에서 병목현상이 심화하자 '통로 국가'인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등이 난민 주차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동유럽 국가들은 서로 비방하고 책임을 묻는 날 선 설전을 계속했다. 다만 이들 국가는 유럽연합(EU)의 강제할당 논의에는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우왕좌왕 동유럽 폭탄돌리기…제비뽑기 선별입국에 난민들 분노

독일과 북유럽으로 가려는 중동 난민들의 주요 경로인 헝가리가 국경을 닫고서 동유럽 국가들의 '난민 폭탄돌리기'가 확산하고 있다.

헝가리는 올해 들어 입국한 이민자가 21만명이 넘어 추가 수용할 수 없다며 지난 15일부터 세르비아 국경을 폐쇄했고, 시위를 벌인 난민들에게 최루탄과 물대포로 대응했다.

동유럽 정상 가운데 무슬림 이민자에 가장 적대적인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기독교가 기반인 유럽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며 국경의 장벽을 루마니아, 크로아티아로 늘렸다.

이에 가장 빠른 길이 막힌 난민들은 크로아티아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고, 세르비아는 버스를 동원해 난민들을 크로아티아 국경으로 실어줬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의 국경 폐쇄를 비난하며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하루 만에 1만여명이 몰려들자 두 손을 들고 국경을 폐쇄했다. 크로아티아는 한계를 넘었다며 지난 18일부터 버스를 동원해 난민들을 대거 헝가리로 돌려보냈고, 일부는 북부 슬로베니아 국경에 떨어뜨렸다.

이에 헝가리는 크로아티아에서 넘어온 난민들을 그대로 버스에 실어 북부 오스트리아 국경에 내려줘 걸어서 국경을 넘어가도록 떠넘겼다. 또 슬로베니아 경찰은 크로아티아 국경에서 걸어 넘어온 난민들을 불법 입국자로 체포해 버스에 실어 다시 크로아티아로 보냈다.


크로아티아 통신사 HINA는 21일(현지시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대기중이던 이민자 가운데 500여명이 전날 밤부터 이날 오전까지 슬로베니아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슬로베니아는 EU 규정에 따라 난민 신청을 받아야 하지만 수용 시설이 부족하다며 입국 규모를 제한했다. 따라서 가족 단위의 시리아 난민에 우선권을 주고 제비뽑기로 입국자를 선별했다.

이에 주로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전날 밤 접경 지역의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여 한때 국경이 폐쇄됐다.

크로아티아는 또 세르비아 국경에서 넘어온 난민 1천500여명을 기차에 태워 북부 헝가리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이들 국가가 서로 국경을 막았다가 열고 떠넘김에 따라 오스트리아 남부 접경 지역에는 지난 주말에만 1만5천명이 몰려들었다.


◇병목현상에 통로 국가들 '난민 주차장' 우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 길이 막히자 그동안 통로 국가였던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가 난민 주차장으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중동 난민들이 터키에서 그리스 섬으로 밀항에 성공하면 그리스 정부가 허용한 요금이 45유로(약 6만원)인 크루즈선을 타고 수도 아테네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세르비아 접경의 헝가리 남부 로즈케 국경 통로가 철조망을 두른 화차로 봉쇄됐다. 헝가리는 이날 개정 이민법 발효로 난민과 불법 이민자 규모가 수용 한도를 넘으면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불법으로 국경을 통과하면 징역 3년형, 철조망을 훼손하면 5년형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리스 정부는 여권이 없어도 3개월 동안 그리스를 여행할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하고 있으며, 난민들 지체하지 않고 곧장 북부로 이동해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를 거쳐 솅겐조약의 국경인 헝가리로 향하고 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가 국경을 봉쇄했지만 마케도니아로 입국한 난민은 전날 하루에만 6천명에 이른다.

EU와 솅겐 가입국이 아닌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는 난민들에게 3일간 체류할 수 있는 허가증을 주고 독일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최근 헝가리와 크로아티아가 국경을 닫자 통로 국가였던 이들도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있다.

마케도니아는 북부 국경이 차단된다면 병목 현상의 도미노 효과를 피할 수 없다며 그리스 국경 통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요하네스 한 EU 확대담당 집행위원도 촤근 마케도니아 의회에서 "발칸 국가들 역시 난민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발칸 반도가 난민의 주차장이 되지 않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크로아티아는 22일 열리는 EU의 난민위기 각료회의에서 사태의 책임을 그리스에 묻겠다고 밝혔다.

란코 오스토지치 내무장관은 이날 세르비아 접경 지역의 난민캠프에서 기자들과 만나 "그리스는 난민 유입을 차단해야 한다"며 "그리스가 난민수용소를 비우고 사람들을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를 거쳐 크로아티아로 보내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유럽, 상호 비방전 가열…난민쿼터제 반대는 한목소리

동유럽 국가들이 난민을 떠넘기고 국경을 닫으면서 서로 난민정책을 비방하는 설전도 연일 가열되고 있다.

조란 밀라노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헝가리가 망명 신청자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하자 페테르 시야르토 헝가리 외교장관은 "크로아티아가 난민들을 단 하루도 돌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맞받아쳤다.

헝가리가 루마니아와도 철조망을 설치하겠다는 발표에 양국 간 충돌도 심화했다.

루마니아 외무부는 지난 15일 자국 주재 헝가리 대사를 불러 항의했으며, 전날에는 보그단 아우레스쿠 외교장관이 "자폐적이고 용납할수 없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에 시야르토 장관은 부패 혐의로 기소된 빅토르 폰타 루마니아 총리를 거론하면서 "총리가 재판을 받고 있으니 외교장관으로부터 겸손한 태도를 기대하겠다"고 말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도 갈등을 빚었다. 베르너 파이만 오스트리아 총리는 지난 12일 헝가리를 나치에 비유하며 "난민을 열차에 넣어 보내버리는 건 유럽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비난하자 시야르토 장관은 "21세기 유럽지도자가 할 말이 아니다"라며 오스트리아 대사를 소환했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은 EU 지도부가 난민을 강제 할당하려는 것에는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헝가리와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라트비아 등은 이날 난민위기 해법과 EU 난민쿼터제에 대응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올해 들어 망명을 신청한 난민은 130명이었지만 대부분 독일 등으로 떠나고 28명만 남았다며 강제할당은 난민들도 원하지 않는 방안이라고 밝혔다.

미로슬라프 라이차크 외무장관은 "복권을 추첨해서 당첨자는 독일로 가고 당첨되지 못한 사람들은 슬로바키아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으로 가야 하는가"라며 "이건 정말 나쁜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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