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허기진 군상] (8)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 한국 이주노동자의 역사
박용필·김지원 기자 phil@kyunghyang.com
ㆍ파독 광부·중동 건설 인력 등 한국도 이주자 설움…80년대 말 ‘송출국’서 ‘유입국’으로

“광활한 ‘뉴 프런티어’에서 청운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고국을 떠나려는 동포들의 앞길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경향신문 1962년 2월22일).

전후 경기침체와 늘어가는 실업자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꺼내든 카드는 ‘해외 이민’이었다. 1962년 정부는 내국인 2만1000여가구를 5년에 걸쳐 해외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승인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된 이민단은 “한국민의 국민성·습속·근면성을 널리 만방에 알리는 민간인에 의한, 이른바 국민외교” 사절의 역할까지 안고 만리이역으로 향했다.

파독 광부 1960년대 독일에 파견돼 광부로 일하던 노동자들이 간식과 물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농업 이민이 주를 이룬 중남미행을 한 축으로, 광부·간호사들의 독일행도 붐을 이뤘다. 1963년 정부가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자 4만6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영화 <국제시장(2014)>에서 주인공은 파독 광부로 선발되기 위해 면접 때 쌀가마니를 들고 목청 높여 애국가를 불렀다.

1963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광부·간호사 1만8766명이 새 희망을 품고 독일로 향했지만 일은 매우 고됐다. 1965년 10월15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K대 법대 출신 정모씨는 1964년 파독광부시험에 합격해 애슈바일러 탄광에서 1년간 일했다. 정씨는 “힘겨운 노동에 못 견딘 ‘인텔리’ 중엔 일부러 부상을 입어 쉬거나 중간에 집으로 가려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그해 파견된 2000여명의 광부 중 6명이 계약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했다. 1970년대 이후엔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하고 제3국으로 탈주하는 경우도 늘었다.

중동 취항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부다비 취항을 알리는 대한항공의 1979년 신문광고. 1970년대 중동 건설붐으로 이 지역 항공편도 크게 늘었다.


타국에서 ‘외지인’으로 겪는 설움은 녹록지 않았다. 1965년 4월6일 독일 클로크너사 소속 한국인 광부들은 3일간 파업을 벌였다. 파독 광부 이덕영씨(28)가 독일인 동료에게 부당하게 얻어맞고 전치 2주의 부상을 당했으나 회사 측이 적절히 대처하지 않자 저항에 나선 것이다. 독일 탄광회사는 한국인 광부들의 파업에 따른 손실에만 관심을 보였다. 이씨는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민족지기를 보여야 한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이들이 고된 노동 끝에 국내로 보내오는 돈은 한때 국내총생산(GNP)의 2% 수준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1차 석유파동의 대책으로 노동자·기업의 ‘중동 진출’을 제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 기념식’에서 “중동지역을 비롯해 세계에 진출한 우리 건설역군은 구슬땀을 흘리며 우리 겨레의 기상을 세계 속에 심고 있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당시 중동 건설 노동자들은 가정에서도 ‘천딸러’(박완서 소설 <여인들(1977)>)로 치환됐고, 그들의 애환이 수면 위에 떠오를 기회는 적었다.

불법체류자 출국 반발 집회 2002년 중국 동포들이 정부가 밝힌 중국 동포 불법체류자 전원 출국 방침에 반발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1980년대 후반은 한국 이민사상 중요한 시기다. 한국이 ‘송출국’에서 ‘유입국’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1989년 10월 기사에서 “국내 저임단순인력의 구인난이 심각해지며 선진국, 파키스탄 등지에서 ‘국제품팔이꾼’이 몰려들고 있다”고 전했다. 당시 법무부는 “매년 10%가량 불법취업자가 늘고 있다”고 했다. 산업계의 요구로 아시아계 이민노동자들이 점차 늘기 시작해 1992년에는 불법취업 외국인 규모가 7만~10만명에 이르게 됐다.

이에 정부는 1993년 ‘산업기술연수생제’를 채택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시한부 ‘연수생’의 신분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인데, 당시 이들은 급료가 최저임금 수준도 되지 않고 산재·의료보험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현대판 노예제’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주노동자 노조 허가 이주노동자들이 설립 10년 만인 지난 8월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인가를 받고 환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2004년 ‘고용허가제’를 도입했으나 “노동자의 사업장 이동 불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주의 부당 대우에도 한국에 남기 위해 불합리한 행태를 참아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2012년 8월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이주노동자의 사업자 변경 제한 등이 포함된 고용허가제를 재개정하라고 권고했다. 2014년 10월 국제앰네스티는 4년10개월간 자발적 사업장 이동이 불가능한 현실에 대해 “인신매매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을 얻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대법원의 이주노조 합법화 판결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은 2005년 5월 설립돼 올해 8월에야 정식 노조 허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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