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죽음 부르는 '고용허가제'···"착취 못 벗어나"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등록 2017-09-09 12:50:07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 이주노동자 쉼터 '청주네팔쉼터', 시민단체 '이주민들레'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한 네팔 이주노동자 케샤브 슈레스타(27)씨의 유서. (출처 이주민들레, 청주네팔쉼터)

시행 14년째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들 직장 이동 제한
"사업장 옮기면 재취업 힘들어···무조건 사장 말 잘 들어야"
2007년부터 최근까지 주한 네팔인 사망 원인 1위가 자살
열악한 근로 여건에도 회사 옮길 수 없어 극단적 선택 잇따라

 【서울=뉴시스】유자비 기자 =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오늘 세상과 작별 인사를 합니다." 

 지난달 7일 충북 충주의 한 자동차 부품제조회사 공장 기숙사 옥상에서 네팔 이주노동자 케샤브 슈레스타(27)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결혼 직후 돈을 벌어오겠다며 한국으로 온 지 1년 4개월 만이다.

 그는 전날 네팔어로 공책에 유서를 남겼다.  

 "회사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았고, 다른 공장에 가고 싶어도 안 되고, 네팔 가서 치료를 받고 싶어도 안 됐습니다. 제 계좌에 320만원이 있습니다. 이 돈은 제 아내와 여동생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달 사이에만 2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고용허가제는 사업자의 외국인 인력 고용을 허가하고 관리하는 제도다. 불법 체류, 인권 유린 등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04년 8월부터 시행됐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이 자유롭지 않아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고용허가제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된 것은 지난달 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케샤브 슈레스타씨의 유서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개되면서다. 유서를 공개한 이주노동자 쉼터인 '청주네팔쉼터'와 시민단체 '이주민들레' 등에 따르면 궂은일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건강이 악화된 그는 회사를 바꾸거나 네팔에서 잠시 치료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사업장에 전달했지만 거부당했다. 지난달 8일 홍성 돼지 축산농장에서 근무하던 네팔인 이주노동자도 비슷한 괴로움을 호소한 뒤 죽음을 택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열악한 근로 여건에도 회사를 옮기기 어려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는 5만8000명 정도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사업장 변경이 제한돼 있다. 예외적인 경우 세차례까지 회사를 옮길 수 있지만 사업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성실근로자 제도를 통해 한국에서 재취업할 기회를 얻으려면 한 사업장에서 계속 근무를 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의 우다야 라이 위원장은 "이주노동자들은 직장 이동의 권리가 없는데다 성실 근로자 제도로 한국에 재입국하려면 사업주 말을 잘 듣는 노동자가 돼야 한다"면서 "열악한 근로 여건에도 버티며 일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농축산업, 임업, 수산업계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피해 사례가 늘고 있다고 관련 단체들은 설명한다. 이들 산업에서 종사하는 근로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의 근로시간, 휴게, 휴일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휴식 시간도 보장받기 힘들다.

 충북 청주의 한 양돈농장에서 일하는 네팔 출신 20대 중반 이주노동자 푸시카 카르키(가명)씨는 가축 분뇨 악취에 시달리고 주말에도 쉼 없이 일하다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는 사업주에게 "몸이 너무 아프니 쉬게 해달라"고 수차례 사정하다 사업장을 바꾸겠다고 했다. 하지만 사업주는 이를 거부했고 휴식 시간을 주기는커녕 숙소 문을 강제로 열어두게 하며 감시를 시작했다. 그는 "매일 밤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며 극심한 우울감을 호소했다. 

 지역 시민단체 '경남이주민센터'와 '주한네팔인교민협의회'가 주한네팔대사관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7년부터 올해 8월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한 네팔인은 총 36명. 같은 기간 주한 네팔인의 사망 원인으로 '자살'이 '산재'(21명)와 '질병'(19명)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경남이주민센터 김광호(43) 상담실장은 "충북 네팔 이주노동자가 남긴 유서를 계기로 실태 조사를 했는데 자살이 사망 원인 1위란 수치는 충격적"이라며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아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사업장을 바꾼 이주노동자라도 사용자의 근로조건 위반 또는 부당한 대우 등 사업주 책임이 명확하다면 성실근로자제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엔 의사소통 문제 등 걸림돌이 적지 않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8.20 전국이주노동자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민주노총, 이주노조 등 이주노동자 단체가 주최한 이날 결의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이주노동자 노동기본권 보장, 고용허가제 폐지, 사업장 변경의 자유 보장,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중단 등을 주장했다. 2017.08.20. mangusta@newsis.com

 지난 2015년 경상남도 함안의 한 부품공장에서 근무하던 20대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 3명은 임금체불과 사업주의 욕설에 시달렸다. 회사를 바꾸려다 사장으로부터 "땅에 묻어버린다. 회사 바꾸려면 2000만원 내놔라"라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 이들은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아 욕설 녹음 파일을 증거자료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냈다. 결국 사업주가 기소돼 직장을 옮겼지만 이 과정까지 모두 6개월이 넘게 걸렸다. 

 김 상담실장은 "이런 경우는 외국인의 귀책사유가 아님이 증명됐기 때문에 성실 근로자 재입국엔 문제가 없다. 함께 일했던 마지막 사업주가 동의하는지가 남았다"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의사소통 문제도 있고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해당 회사에 매여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과정"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직업선택의 자유, 행복추구권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라며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한 고용허가제의 개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고용허가제는 사용자 중심으로 맞춰져 있어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며 "이주노동자들은 노동 강도가 세고 위험해 내국인들이 피하는 사업장에서 주로 일하기 때문에 더욱 버티기 힘들다"라고 밝혔다.
  
 윤 변호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현행 3년 근로계약을 1년 단위로 체결하게끔 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은 최초 3년을 한국에서 일한 뒤 최장 1년10개월간 연장할 수 있다. 이를 1년 단위로 바꿔 사업장을 선택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associate_pic
【서울=뉴시스】박주성 기자 = 14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사망사건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 단체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민주노총과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 등 참가단체들은 이주노동자 착취제도이자 죽음의 제도인 고용허가제를 폐지하고 전체 이주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의 근본적 보장을 촉구했다. 2017.08.14. park7691@newsis.com

 그는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에 대한 교육과 한국 문화 등을 교육받지만 사업주들에 대해서는 법 준수나 인권 교육이 없다"며 사업주들에 대한 인권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장을 바꾼 이주노동자들도 성실근로자 제도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은 "직장을 옮겼다고 해서 불성실한 것은 아니다"라며 "사업장 변경을 요건으로 제한해서는 안된다"라고 강조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