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전 그때로 돌아간다면, 결코 한국에 가지 않을 거에요”

방글라데시 다카|장회정 기자 longcut@kyunghyang.com

ㆍ16년간 이주노동자로 살았던 샤킬의 한국 그리고 방글라데시

한국 체류 당시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의 이름을 나열한 샤킬은 “보고 싶어요”라고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남겼다. 인터뷰 후 그를 태운 릭샤가 세계 최악의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다카의 도로 속을 파고 들었다. 방글라데시 | 다카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한국 체류 당시 이주노동자 인권 운동을 함께한 ‘동지’들의 이름을 나열한 샤킬은 “보고 싶어요”라고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남겼다. 인터뷰 후 그를 태운 릭샤가 세계 최악의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은 다카의 도로 속을 파고 들었다. 방글라데시 | 다카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오후 5시 무렵,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 거리는 자전거택시 릭샤와 CNG(압축천연가스를 연료로 하는 오토 릭샤), 버스, 승용차로 뒤엉켜 있었다. 운전자 1인당 2초에 한번꼴로 울려대는 경적 소리는 이방인의 혼을 쏙 빼놓았다. 육교 위에서 샤하박 사거리를 내려다본 샤켈 아호메드 샤킬(55)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밀리는 것도 아니에요. 움직이잖아요.” 

벵골어(방글라데시어)를 구사할 때도 한국어를 하는 것 같아 귀를 의심케 하는 통역가 샤킬은 1992~2008년 한국에서 생활한 이주노동자였다. 또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 활동가이자, 산재 피해자 그리고 <불한당들>을 비롯한 두 편의 한국영화에 출연한 배우였다. 한국생활 16년간 각종 이주노조 집회의 선봉에 섰고, 방글라데시 귀국 이후엔 공부방을 운영하며 풀뿌리 교육을 하고 있다. 

공식 일정을 마친 뒤 인터뷰를 요청하자 그는 하루만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 “내일 다카대학교 TSC 앞에서 오후 2시에 뵙겠습니다”라는 ‘카톡’이 왔다. 

■ 의도하지 않은 한국행 

오후 5시 귀가길을 재촉하는 이들로 혼잡한 다카 시내 샤하박 사거리를 배경으로 선 샤킬. 10년 전 한국에서 돌아온 뒤 마주한 이 혼잡은 샤킬에게도 낯선 풍광이었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오후 5시 귀가길을 재촉하는 이들로 혼잡한 다카 시내 샤하박 사거리를 배경으로 선 샤킬. 10년 전 한국에서 돌아온 뒤 마주한 이 혼잡은 샤킬에게도 낯선 풍광이었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원래는 방글라데시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1981년 방글라데시는 군부 쿠데타로 군사독재 시대를 맞았다. 샤킬은 자가나트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부터 독재 반대 투쟁을 해왔다. 91년 독재 정권은 종지부를 찍었고 샤킬이 소속된 야당 BNP(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는 이후 총선에서 과반을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득세했다. 하지만 내부 갈등까지 끌어안지는 못했다. 회의를 느낀 샤킬은 일본행을 결심하고 홍콩으로 건너갔으나 일본비자의 벽은 높았다. 

“한국 사람들은 날카로워서 지내기 힘들 수 있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92년 관광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온 이유다. “인천 청천동 공중전화기 공장에서 일했어요. 의사소통도 안 되고 눈치로 봐가면서 일을 시작했어요. 욕 많이 먹었어요(웃음).” 

전체 직원 70여 명 중 방글라데시인이 3명이었다. 일부 동료는 샤킬을 ‘새끼’라고 불렀다.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위험한 자동프레스 업무는 이주노동자의 몫이었다. 탈의실을 기숙사 삼아 살았는데, 술에 취해 새벽 2, 3시에 씻겠다며 문을 두드리는 동료도 있었다. 인천 생활 2년을 채웠지만, 벌어놓은 돈이 없었다. 아침 8시30분부터 밤 10, 11시까지 일해도 월급이 25만원, 많아야 30만원이었다. 처음엔 김치 냄새도 고역이었다. 동료들과 회사 식당을 빌려 방글라데시 음식을 해먹었다. 그마저도 한국인 직원들이 “카레 냄새 난다”며 항의하는 바람에 오래 가지 못했다.

“사장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사우디에서 몇 년 일했던 분이라 우리를 많이 배려해줬어요.”

다른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친구들은 “너네는 천국인 줄 알라”고 했다. 알고 보니 1년 가까이 월급도 못 받고 있었다. 한국말을 비교적 빨리 익힌 샤킬이 ‘대리 항의’에 나섰다. 경비견이 지키고 선 사장 사무실에 찾아가 체불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자, 사장은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월급이 무슨 소리냐”며 “빨리 나가지 않으면 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했다. 사장이 손에 쥐고 있는 여권을 포기하고서라도 나와야 했다. 

친구들과 안산으로 옮겼다. 인천에 비하면 이주노동자 천지였다. 말도 통하고 기술도 제법 익혀서 고생도 덜했다. 99년 초로 귀국 계획도 잡았다. 순조롭던 일상은 귀국 1년을 앞두고 허리를 다치면서 흔들렸다. 무거운 걸 많이 들어 척추 물렁뼈가 터져버린 것이다.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공장장은 신경을 죽이는 침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장은 독한 진통제를 건네며 비행기 타고 고향에 가라고 했다. 샤킬은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한국어를 할 수 있어서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신경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침 치료를 거부하고, 안산 이주노동자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안산중앙병원에 들어갔다. 

“입원해서 많은 환자들을 만났어요.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철판덩어리에 발을 잃은 사람도 봤어요. 재단 작업으로 오른손 손가락이 나가버린 사람도 있었어요. 사장은 ‘보상받기 위해 일부러 잘랐다’고 말했대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했어요.” 

■ 이주노조에 앞장서다 

2000년대 중반 서울·경기·인천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샤킬. 눈빛이 형형하다.

2000년대 중반 서울·경기·인천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샤킬. 눈빛이 형형하다.

허리보호대를 찬 상태로 비공식 활동에 들어갔다. 이주노동자들을 만나 불편한 건 없는지, 다친 데는 없는지, 월급은 받았는지 물어보고 다녔다. 민주노총 산하 평등노조 이주지부로 시작해 이주노조를 꾸리는 데 앞장섰다. 샤킬은 2003년 정부의 강제 출국조처에 항의하며 명동성당에서 380일간 벌인 농성이 이주노동자를 결집시킨 계기가 됐다고 돌아봤다. 이주노조 설립 이후 아느와르 후세인 초대 위원장이 표적단속 됐을 때, 그는 직무대행을 맡아 위원장의 석방운동과 더불어 노조의 실질적인 운영을 맡았다. 

“이주노조 활동으로 보람을 느낀 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땅에서 노동권을 보호받지 못한 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렸다는 거예요. 한국 분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서 외국 분들이 일하고 있고 그것이 한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많이 알렸어요.”

당시 샤킬은 꽤 알려진 이주노동자였다. 아울러 법무부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틈틈이 전화해 “왜 안 가느냐?”고 묻는 관리대상이기도 했다.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출입국사무소’란 말에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원래 한국인들도 사우디, 일본, 독일 가서 일했고 지금도 외국 가서 일하잖아요? 합법이든 불법이든 그 나라에 도움을 주고 자기도 생활비를 버는 건데 왜 단속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단속은 비인간적이라 생각해요. 단속 피하려다 옥상에서 떨어져 죽고 차에 치여 죽고. 이런 식으로 단속 안 해도 돼요. 미국, 독일, 호주, 캐나다에서 그렇다는 얘기 못 들었어요.”

자신이 겪은 한국의 대통령 이름을 죽 나열하던 샤킬은 이명박 정권 때 이주노동자 탄압이 가장 심했다고 말했다. 활동가에 대한 표적단속이 극심했다. 이주노조는 위원장을 비롯해 수석부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을 한 번에 잃었다. 이후 총회에는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샤킬은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는 어느 정도 합리적이었어요.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고민도 많이 하고 시민사회단체 얘기도 많이 들었고 이주노조 활동에 대한 탄압도 많이 없었어요. 문재인 대통령도 이주노동자나 이주노조에 대해 잘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아요. 사람을 사람답게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008년 8월 샤킬은 법무부로부터 10일 안에 한국을 떠나라는 최후 통보를 받았다. 산재 피해를 입어 하던 일을 포기한 이주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 판을 짜려던 참이었다.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한국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성찮은 형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에 온 동생에게 미안했다. 아픈 아버지 걱정도 앞섰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날, 출국장은 배웅 나온 동지와 지인들로 북적였다.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은 그가 비행기를 타는지 끝까지 확인한 뒤에야 사라졌다.

“방글라데시에서 뭘 할 건지 어느 정도 준비하고 왔어야 했는데 갑자기 오게 되어 너무 힘들었어요. 16년간 한국에서 살다왔더니 여기는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먼지도 많고….”

방글라데시 귀국 이후, 한국에서 받은 상처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6개월간 집 안에 박혀 있었다. 신호등을 찾아보기 힘든 도로를 건너는데 20~30분이 걸렸다.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에게 조용히 할 수 없느냐고 화풀이를 했다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보다 못한 조카들이 삼촌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섰다. 한국에서 인연을 맺은 활동가들과 함께 네팔을 다녀오며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누군가 투자비용이 안 드는 일이라며 통역을 권했다. 샤킬은 한국사람들 만나서 한국 소식을 들을 수 있어 이 일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 다시 20대가 된다면…  

2010년 아내 시에다와 결혼한 샤킬은 6살 딸 이디다를 두었다.  사랑 많이 받은 티가 나는 이디다는 카메라 앞에서 연신 혀를 내밀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2010년 아내 시에다와 결혼한 샤킬은 6살 딸 이디다를 두었다. 사랑 많이 받은 티가 나는 이디다는 카메라 앞에서 연신 혀를 내밀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방글라데시에서의 마지막 날, 샤킬은 기자를 집으로 초대했다. 릭샤와 CNG를 번갈아 타고 남다카 주레인 지역으로 갔다. 북다카가 비교적 정돈된 신도시라면, 남다카는 오래된 구도심이다. 문도, 번호판도 없는 ‘동네용 CNG’를 타고 10분여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거슬러가자 연두색 페인트로 곱게 단장한 그의 집이 나왔다. 본격 우기도 아닌데 골목 곳곳에는 물이 들어차있었다. 하수구 시설 미비 때문에 오·폐수가 넘쳤다고 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피부병은 일상이다. 정부 대책을 기대하기 힘든 주민들은 침수 피해를 막기 위해 2년에 한번꼴로 집 바닥을 높이는 공사를 한다.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1층은 이미 지하에 묻힌 지 오래였다. 

샤킬의 부인 시에다가 준비한 점심상을 받았다. 다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생선튀김부터 가지구이, 양고기찜, 감자크로켓까지 재료 본연의 맛과 특유의 양념맛을 살린 음식을 적절히 섞어낸 식탁에서 시에다의 내공이 전해졌다. 사랑을 많이 받은 티가 나는 6살 딸 이디다는 공부방에 간다며 가방을 들고 나섰다. 2010년 샤킬은 결혼식을 올렸다. 독재 반대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를 둔 시에다는 말이 잘 통하는 맞선 상대였다. “방글라데시에 있을 때는 독재정권 반대운동으로 잠을 못 자게 하더니, 한국 가서도 운동을 하는구나”라고 하셨던 아버지는 결혼식 일주일 뒤 돌아가셨다.

“제가 아주 노총각으로 장가를 갔거든요(웃음). 아직 아이가 6살이라 언제 공부를 시키나, 걱정도 많아요. 한국에 있을 때 엄마도 돌아가시고, 돈도 못 벌어서 조금 후회가 되지만 그래도 지금은 한국에 고용허가제가 도입되어 어느 정도 노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하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후회보다 만족이 많아요(웃음).” 

샤킬은 쉬는 날이면 동료들과 찾았던 오이도, 해운대, 경포대의 바다가 많이 생각난다고 했다. 회식 때 마신 소주 한잔의 추억은 술 문화가 없는 방글라데시에서는 쉬이 잊혔지만, 상추에 마늘 얹어서 싸먹은 생선회 맛은 지금도 입안에 감돈다. 하지만 청춘을 바친 한국에 대한 추억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먼저 묻지도 않았는데 그가 잘라 말했다. “다시 20대가 된다면 한국에 가지 않아요.”

샤킬이 방글라데시 남다카 주레인 자택 1층에 운영하는 ‘기쁨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다. 오렌지색 벽과 민트색 책상 등 아이들의 기분을 배려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샤킬이 방글라데시 남다카 주레인 자택 1층에 운영하는 ‘기쁨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다. 오렌지색 벽과 민트색 책상 등 아이들의 기분을 배려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렸다. 목에는 하나같이 ‘딜라이트 에듀케이션 센터(기쁨공부방)’ 명찰 줄을 달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를 담은 배지를 단 아이도 있었다. 샤킬은 4년째 기쁨공부방을 운영 중이다. 가사도우미, 릭샤 운전사 등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의 자녀들이 다닌다. 학년별로 학급도 구성하고, 선생님도 고용했다. 연두색, 주황색 등 경쾌한 색으로 교실을 꾸민 것도 아이들이 오고 싶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위생 교육도 함께한다. 화장지는 물론 수세식 변기를 처음 써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살다 보면 필요한 것은 그런 교육”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주노동희망센터의 지원으로 설립한 보리샬희망학교의 관리도 맡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 사람의 30~40%는 초등학교도 안 나왔어요. 방글라데시에 돌아와 보니 건설노동자나 페인트공 같은 사람들이 ‘몰라서’ 욕을 많이 먹더군요. 몇 인치(inch)를 칠하라는데 그걸 몰라서 실수하는 거예요. 8학년(한국의 중학교 수준)만 마쳐도 인간답게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수업을 마친 ‘기쁨 공부방’ 아이들과 교사가 한 자리에 모였다. 샤킬이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해 4년 전부터 운영 중인 마을 공부방이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수업을 마친 ‘기쁨 공부방’ 아이들과 교사가 한 자리에 모였다. 샤킬이 고된 일을 하는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해 4년 전부터 운영 중인 마을 공부방이다. 방글라데시 다카|강윤중 기자

당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해 일했던 동지들은 본국에 돌아가서도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샤킬의 입으로 듣는 ‘동지’라는 호칭이 끈끈하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여러 명의 이름을 읊었다. 집회 현장에서 이주노동자를 보호해주었던 대학생들이며 동지, 노무사, 변호사, 상담가의 이름이 허공에 흩어졌다. “보고 싶어요. 내가 가지 못하니까 꼭 (방글라데시에) 왔으면 좋겠어요.” 한국에서 수년간 일해 말도 익숙하고 기술도 갖춘 이주노동자들이 비자 연장에 실패해 결국 꿈을 접는 케이스를 많이 지켜봤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 샤킬은 신청해도 비자를 안 내줄 거라며 한국행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접고 있었다. 기사로 안부를 전하겠다는 약속이 이처럼 공허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041718001&code=100100&sat_menu=A071#csidx1d0510662edea34b5c993f3e9baf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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