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네팔 이주노동자들, 한국사회 시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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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0.10.18. 오후 6:40
[경향신문]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여기는 재스민과 천일홍들이 애정을 뿌리며 웃지 않는다/ 새들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여기는 사람들이/ 기계의 거친 소음과 함께 깨어난다.” (서로즈 서르버하라, ‘기계’)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삶창)가 출간됐다. 35명의 시인들은 한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거나 지금도 일하고 있는 네팔 출신의 노동자들이다. 한국에서의 생활, 주로 노동 경험이 시 속에 녹아 들었다.

낯선 땅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한국인들이 떠난 일터에서 일하는 네팔 노동자는 이곳을 ‘기계의 도시’라고 말한다. “하루 종일 기계와 함께 기계의 속도로 움직”이며, “사람이 기계를 작동시키지 않고 기계가 사람을 작동”시키는 곳. 시인은 “기계와 같이 놀다가 어느 사이 나도 기계가 되어버렸구나”라고 이야기한다.

표제시인 ‘기계’ 외에도 한국사회를 로봇이나 기계에 빗댄 시들이 눈에 띈다. “꿈들을 꾸역꾸역 담아서” 온 낡은 트렁크, “그 이상한 꿈들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터져버린 가방”과 함께 이곳에 온 시인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문맹처럼/ 로봇을 만드는 나라에서 로봇이 되어”(딜립 반떠와 ‘나’) 일한다. 이제 시인 옆에는 “찢어버린 수많은 꿈들이 적힌 종이와/ 연기가 되어 타고 남은/ 수많은 희망의 꽁초들이 가득”하다.

고향의 가족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심장을 쪼개서” 한국에 온 또 다른 시인은 “이제는 당신의 기계의 족쇄를 차고/ 슈퍼 기계가 되어서 움직이고 있어요”(니르거라즈 라이, ‘슈퍼기계의 한탄’)라고 말한다. 황규관 시인은 시집 해설에 “거의 본능적으로 근대문명이 무엇인지, 특히 한국의 근대가 어떤 이면을 가졌는지 날카롭게 간파한다”며 “기계문명에 대한 시적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시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측면”이라고 썼다.
러메스 사연의 시 ‘고용’은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아프게 직시한다. 풍자적 은유가 가득한 이 시에서 “굶주림과 결핍의 신”인 ‘사장님’은 화자의 삶은 물론 죽음까지도 통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의 말미, “이제는 나를 죽게 해주세요”라는 화자의 요청에 ‘사장님’은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을 모두 끝내고 내일 죽으라고 답한다.

시집 전반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정서 중 하나가 이런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산재로 악명 높은 조선소에서 일하는 시인은 “한 줌의 숨을 담보 삼아 한 뼘의 땅을 담보 삼아 / 죽음의 계약서에 서명하고”(수레스싱 썸바항페, ‘나는 배를 만들고 있다’) 배를 만든다. 또 다른 시 ‘외국에 있는 아들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디알 네우빠네)에선 네팔에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행복을 찾아 희망을 품고 간 너희들이/ 왜 시체가 되어서 돌아오는 거니?”라고 묻는다.

이렇듯 시집엔 단순한 고발이나 항의를 넘어선, “우리의 빈곤한 영혼을 아프게 확인”(황규관 시인)하는 시들이 다수 수록됐다. 한국인들이 보지 못하는, 혹은 외면해온 우리사회의 모습이 이들의 시를 통해 드러난다.

시집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시집 출간엔 정대기 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 총장 대행의 역할이 컸다. 네팔, 몽골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문화·예술인 교류를 후원해온 그는 3년 전 한국과 네팔 문인들이 교류하는 학술행사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시집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네팔 시인의 방한 소식에 찾아온 이주노동자 뻐라짓 뽀무가 네팔인 시 모임과 커뮤니티를 통해 시를 모았다. 그렇게 모인 35명의 시를 번역가 이기주·모헌 까르끼 부부가 맡아 옮겼다. 시인 35명 가운데 상당수는 네팔에서 시집을 출간했거나 시를 발표한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는 현재 네팔에서도 출간을 준비 중이다.

정대기 총장 대행은 “자존감이 강한 네팔 청년들이 한국에서 일하며 여러 충격과 정신적인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고, 실제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자살률도 높다고 한다”며 “이들의 목소리를 한국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기주 번역가는 “네팔 시인들에게 고된 노동의 탈출구가 시가 되지 않았나 싶다”면서 “이 시집으로 한국사회가 이주노동자들에게 갖는 편견이나 인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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