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 스며든 톨레랑스 제로 독트린 - 정보

 이명박 정부의 톨레랑스 제로 신도들에게 추천하는 책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우리나라에 금메달을 안긴 모태범 선수와 이상화 선수의 허벅다리는 아름다웠다. 그들은 서양 선수보다 키는 작았지만 허벅다리는 오히려 더 굵었다. 근력을 키우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길고도 큰 고통을 이겨내야 저처럼 거대한 허벅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될까. 사실 두 선수뿐만이 아니라 올림픽에 출전한 모든 청춘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드라마에는 사람을 열광케 하는 ‘초절정’ 순수함이 있다. 그런데도 올림픽 흥행의 바탕에 깔린 국가 간 혹은 민족 간의 경쟁의식(사실 적대에 가깝다)이 때론 섬뜩하다.

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른다고 해서, IOC 위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것처럼 세계가 평화로워질 리는 없다. 평화와 올림픽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심술궂게 말하는 듯한 곳이 바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이다. 1984년 유고연방의 수도였던 이곳에선 제14회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비동맹국의 맹주 격인 유고가 개최하고 동유럽에서는 처음 열린 올림픽이어서 49개국에서 선수·임원 합쳐 1500명이나 참여했다. 그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오랜 만에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타이완도 함께 출전해 실제로 세계가 조금은 평화로워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한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주변.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한 동계올림픽 경기장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고연방은 내전으로 갈가리 찢겼다. 종교와 민족을 초월해 ‘하나의 국가’를 표방했던 유고는 그 제창자인 티토 대통령이 죽자 사실상 8개 독립국가로 나뉘어버렸다. 그 과정에서 20만명 가깝게 죽었으며, 25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고, 2만명이 넘는 이슬람계 보스니아 여성이 강간당했다. 사라예보의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주변 녹지와 체육시설은 모두 묘지로 변했다. 지금 그곳에는 이슬람 특유의 가늘고 긴 묘비를 앞세운 무덤 8000여 개가 늘어서 있다. 좁은 분지인 사라예보 시 외곽의 언덕에서 세르비아군이 포격과 조준 사격을 하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평화의 제전’이 치러진 장소가 공동묘지로 변하고 말았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고연방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이 어느 민족, 어느 종교에 속하는지조차 잊고 살았다. 심지어 신고만 하면 민족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누가 어느 민족이고 어느 종교를 갖고 있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어릴 적부터 같은 마을에서 친하게 살아오다 하루아침에 돌변해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

아사히 신문 전 환경전문기자 이시 히로유키 씨의 책 <나의 지구 편력>에 따르면 상냥하며 가족을 사랑하고 의리와 인정이 넘치는 순박한 발칸 반도 사람들을 미혹한 것은 한줌도 안 되는 정치가였다. 그리고 선동에 앞장선 것은 270개에 달하는 지방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이다. 무려 100만명이 학살당한 르완다 내전의 한가운데에도 있었던 이시 히로유키 씨는 “르완다에서도 아침부터 밤까지 선동을 계속해 부족 간의 살육을 부추긴 것은 라디오 방송이었다”라고 증언한다. 상황을 왜곡하는 현지 언론과, 같은 기독교계인 세르비아군의 무자비한 학살에 당황한 서방 언론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유고 내전의 진실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기성 언론이 악취를 풍기는 곳에서 코믹 저널리즘은 빛난다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 출신이어서인지 다문화 감성을 타고난 미국의 저널리스트 조 사코는 코믹 저널리즘(Comic Journalism)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는 볼펜(글 쓰는 기자를 가리키는 언론 업계의 ‘전문 용어’)이나 사진, 혹은 영상물이 그 매체의 한계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부분을 거침없이 만화로 표현해냈다.
그가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을 취재해 그린 작품 <팔레스타인>은 1996년도 미국 출판대상을 받았다. 바로 그 조 사코가 유고 내전의 진실을 알리려고 오랫동안 현지에 머물면서 취재해 쓴 작품이 <고라즈데>이다. 기성 언론이 악취를 풍기는 곳일수록 코믹 저널리즘은 빛난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 동안 세르비아계 군대는 사라예보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동부 지역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급기야 유엔은 모슬렘이 모여 사는 지역을 ‘안전지대’로 지정했는데 국제사회가 외면하는 바람에 세르비아계에 속수무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 되었다. 고라즈데는 안전지대 중의 하나이며 세르비아계의 집요한 공격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곳이다.

조 사코는 1995년 말부터 1996년 초까지 고라즈데를 네 차례 방문했고, 모두 합쳐 4주가량 머물면서 수많은 사람과 인터뷰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의 생생한 증언만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고립된 곳에서 죽음과 직면해온 그들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그것이 그의 남다른 점이다. 그는 보통의 다른 나라 사람보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없는 사람들이 부모와 친지가 학살당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한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좌절하고 견뎌나갔는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는 무지막지한 폭력의 피해자인 보스니아 모슬렘을 묘사할 때도 붓끝에 연민을 담지 않았다. 미국산 리바이스 청바지에 목숨을 거는 철없는 소녀들과 직격탄을 맞아 몸뚱이가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따위의 엽기적인 장면만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를 집요하게 팔려고 접근하는 반미치광이, 뇌물을 주고서라도 고라즈데에서 벗어나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다.

   
보스니아 내전 동안 세르비아계 군대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잔인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무기력함에 분노


미국의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이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 사코는 이 책에서 분노하고 있지만 정작 그 대상은 잔인무도한 가해자인 세르비아계 파시스트인 체트니크가 아닌 듯하다.  그는 기회주의적이고 책임 회피에 급급하며 자기네 안전만 생각하는 평화유지군, 수십년 동안 여차하면 핵전쟁이라도 치를 듯이 전비를 쏟아부으면서도 한 떼의 주정뱅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쳐놓은 도로통제선도 뚫지 못하는 나토에 경멸을 표한다. 그리고 그 처참한 드라마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무기력함에 분노한다.

“세르비아계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겠느냐고요? 전처럼은 안 되죠. 절대로 전처럼 이웃으로 지낼 수는 없어요.”
“(전쟁이 끝났어도) 난 기쁘지 않네요. 아마 감정이 메말랐나보죠. 그저 전쟁이 잠시 멈춘 것뿐이죠.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게 겁나요. 예전의 일이 반복되면 어떻게 하죠?”
그는 고라즈데 이슬람계 사람들의 이 같은 얘기를 전하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어버린, 아니 애초에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게 된 그들의 생각이 옳은 것은 아닌지 두려워한다.

   
가시지 않는 상처로 남은 용산 참사.
얼마 전 아는 분 몇몇과 소주를 한잔하기로 했는데 약속 장소가 서울 마포의 ‘역전회관’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용산역 앞의 바로 그 역전회관(이곳은 떡갈비와 육회가 유명하다)의 분점이다. 술자리에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용산 참사 쪽으로 흘렀다. 역전회관과 가까운,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주변의 건물주들은 모두 수십억원씩 보상을 받아 벼락부자가 됐는데 그곳에 세들어 살던 업소 주인들은 시공사나 조합 관계자 코빼기도 보지 못하고 싸우다가 옥상 망루에서 타죽고 말았다며 한 분이 탄식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나라

김성희씨를 비롯한 만화가 여섯 명은 얼마 전 용산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코믹 저널리즘 기법으로 <내가 살던 용산>이란 책을 썼다(혹은 그렸다). 불법 시위다, 도심 테러리스트의 출현이다 따위로 보수 언론의 왜곡 보도가 극심했던 만큼 코믹 저널리즘의 등장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황석영씨가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난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을 쓰면서 만화가들은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살던 용산>에 따르면 보수 언론이 후안무치한 폭도쯤으로 묘사했던 그들은 우리 시대의 약간 운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전철연이 파견한 ‘꾼’이었다고 보수 언론이 난타한, 망루 시위에 참여했다 사망한 외부 활동가도 알고 보니 서울 순화동이나 경기도 용인, 수원 등지에서 똑같은 일을 당한 철거민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용산 시위에 힘을 보태면 자기들이 시위할 때 용산 식구들이 동참해주리라 기대하며 품앗이를 한 것 이다.

소설가 김연수씨의 말을 빌리자면 만화가들은 철거민들이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책까지 만들어야 했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라는 그의 말은 뼈아프다.

남일당 맞은편 건물에 숨어 들어가 시아버지는 죽고 남편은 중상을 입는 진압 장면을 지켜봤던 고 이상림씨의 며느리 장영신씨에 따르면 조합이나 시공사에 고용된 용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패를 부렸다. 그들은 장사를 못하도록 가게에 와서 시비를 걸거나 오물과 죽은 동물의 시체를 버렸다. 아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때리고 시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며느리에게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를 해댔다.

세상에 어떤 테러리스트가 민간 용역에게 이 같은 수모를 당하겠는가. 그런데도 검찰은 지난해 10월21일, 현장에서 체포된 철거민 9명 모두에게 최고 8년의 실형을 구형했고, 10월28일 재판부는 검사의 기소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정해 최고 6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했다.

어째서 온 국민이 경찰청장의 이름을 외우게 됐을까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경찰의 태도가 왜 이렇게 살벌해졌을까. 어째서 경찰청장의 이름을 온 국민이 외우게 될 정도로 경찰의 세도가 당당해졌을까. 그리고 대한민국 사법권은 없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렇게 가혹할 수 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프랑스 사회학자 로이그 바캉의 <감옥으로 가는 빈곤>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시사IN북에서 곧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은 10년 전인 2000년에 발간됐지만 지금도 세상을 읽는 창으로서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로이그 바캉에 따르면 이 모든 일은 1984년 앤서니 피셔(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상담역이었다)와 윌리엄 케이시(미국 CIA 국장을 지냈다)가 설립한 맨해튼 연구소라는 우익 싱크탱크가 거의 실업자나 다름없던 찰스 머레이라는 정치학자를 스카우트하면서 시작되었다. 찰스 머레이는 이 연구소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지반 상실> <종형곡선>이라는 책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단순했다.

   
미국 대도시의 빈민가 청소와 닮은 한국의 재건축 방식
찰스 머레이에 따르면 모든 것은 지능지수가 좌우한다. 대학에 들어가 성공할지 못할지, 실업자가 될지 백만장자가 될지, 신성한 결혼을 할지 말지 등등. 그리고 그는 인간은 사회 불평등이 불러온 결핍 때문이 아니라 지적 능력의 배급을 적게 받는, 안 좋은 동네에서 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다고도 했다. 그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논리를 전개하며 프랑스 혁명과 함께 등장한 평등이란 도착적 이상이 국가에 독이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맨해튼 연구소는 연간 500만 달러를 들여 찰스 머레이의 이론을 보수 언론과 학술지를 통해 선전해댔고, 이를 덥석 자신의 선거 공약으로 받아들인 이가 전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였다. 그는 역시 맨해튼 연구소가 개발해낸 ‘깨진 유리창 이론’을 신봉하는 윌리엄 브레튼 뉴욕시 경찰청장과 손잡고 뉴욕의 빈민가를 상대로 가차 없는 ‘톨레랑스 제로’(인내심 전무 정도로 해석 수 있겠다)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한다. 범죄의 온상인 빈민 지역을 청소해 국가의 질서를 잡겠다는 브레튼의 불관용 형사 정책은 언론의 환영을 받았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위험한 범죄 도시의 리더로 알려졌던 뉴욕이 갑자기 미국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떠올랐다(하지만 로이그 바캉에 따르면 뉴욕은 통계적으로 한 번도 전자인 적도, 후자인 적도 없었다).

전세계로 번개처럼 번져 나간 톨레랑스 제로 정책

뉴욕에서 탄생한 이 톨레랑스 제로 정책은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유럽 대륙으로 넘어가 전세계로 번개처럼 퍼져나갔다. 이 새로운 형사 정책에 유럽이 열광하고 있을 때 미국 감옥에는 수감자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국은 발 빠르게 감옥을 민영화해 넘치는 수요를 흡수했다. 감옥 산업은 갑자기 월가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유럽이 톨레랑스 제로 정책에 매료됐던 것은 당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는 미국이 경제적으로 일취월장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럽 경제를 지탱해왔던,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 대량 유입돼온 값싼 노동력이 경제의 침체와 더불어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시사IN북에서 곧 번역 출간 예정인 로이그 바캉의 [감옥으로 가는 빈곤]
그러나 로이그 바캉은 지적한다. 유럽은 몰랐다고. 미국의 공식 빈민 수가 3500만이고, 이 숫자는 서유럽의 2~3배에 달한다는 것을. 그리고 6세 미만 아동 다섯 명 중 한 명이 절대 빈곤 속에서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흑인 아동은 두 명 중 한 명이 그렇다는 것을.

톨레랑스 제로 정책은 사회적 약자의 목을 졸랐다. 미국에서는 흑인이, 유럽에서는 이민자가 벼락을 맞았다. 미국의 18세 이상 흑인 청년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징역을 살거나,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거나 보호관찰 요원의 감시 아래 있다. 이 비율은 대도시에서는 2분의 1을 넘고, 흑인 게토 한복판에서는 80% 이상이다. 로이그 바캉은 베트남 전쟁 용어를 빌려 이런 상태를 ‘흑인 청년의 국지화 및 파괴’라고 명명한다. 한때 전세계 인권의 보루로 여겨졌던 프랑스의 상황도 심각하다. 이민자들은 프랑스 사법에는 40단의 변속 기어가 있다고 비꼰다. 사법권이 영화 <13구역>처럼 낙인 찍힌 지역의 주민을 대할 때는 1단을 놓고 폭주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을 밀어붙이다가 시장경제 체제에서 밀려난 극빈 인구가 불어나자 사회 통제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연히 사회복지를 확대해야 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은 형벌을 강화해 감옥을 늘림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런 ‘불온한’ 움직임이 전세계로 확장 중이라는 것이 바로 로이그 바캉의 지적이다.

뉴욕산 톨레랑스 제로 독트린은 이미 한국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 관료든 학자든 ‘법질서’ ‘국가 질서’ ‘평등 이념의 폐기’ 따위 어휘를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가 톨레랑스 제로 신도라고 보면 맞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 사람들의 목소리는 한결 커졌다. 입법·사법·행정의 곳곳에서 이 톨레랑스 제로 정책은 이미 현실이 돼가고 있다.

뉴욕의 빈민가 청소와 닮은꼴인 서울 강북의 재개발

용산을 비롯한 서울 강북의 여러 군데에서 진행되는 이른바 재개발이란 것은 미국 대도시의 빈민가 청소와 빼닮았다. 재개발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건설업자와 돈 가진 사람뿐이다. 그 지역에 살던 원주민은 미국의 흑인처럼 도심에서 더 먼 곳으로 밀려나거나 빈민으로 전락한다. 저항하면 경찰력이 철퇴를 가한다. 빈민의 통제라는 과도한 부하가 걸린 경찰은 사나워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에서처럼 이미 경찰 업무를 대체하기 시작한 민간 용역이 교도 업무를 맡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쇠장갑을 끼고 돌아온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전세계의 약자가 강타당하는 꼴이다.

용산 참사를 보면서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 사코가 고라즈데에서 그랬듯이 너무나 무기력한 자신에게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보수 언론의 왜곡 행태를 보면서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르완다에서, 유고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도 갈등과 증오를 증폭하는 확성기 노릇을 한 것은 언론이었다. 그렇다고 고라즈데 사람들처럼 “이제는 이웃을 믿지 않는다”라고 맥없이 말해야 옳을까.

미국 경제의 침체와 더불어 세계화는 곳곳에서 파탄나고 있다. 미국식 모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세계는 지금 톨레랑스 제로 모델을 포기하고 과거와 같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복원해야 하는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 로이그 바캉에 따르면 선택은 국가가, 시민이 어떤 문명, 어떤 문화를 원하는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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