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영화가 상영되는 걸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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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Posted on March 30th, 2010 at 15:12 by 인도양 | Modify
"나는 내 영화가 상영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감독 14인, 시네마루의 독단적 영화 상영 규탄 1인시위

 

22일 월요일 아침 9시 40분, 출근하는 직장인의 종종걸음이 잦아들기 시작한 광화문 큰 길 건너 흥국생명 앞에는 거대한 검은 조형물 <망치 든 사람>이 흐린 하늘에 망치질을 하고 있다. 나는 서울 역사박물관 옆 작은 극장 앞에 서 있다.

 

극장 마당 안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띈다. 간단하게 눈인사만 나눈 그들은 아무 말이 없다. 따로 따로 서서 벽에 걸린 현수막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시네마루, 제1 독립 영화 전용관'

 

자신의 작품 상영을 거부하는 감독, 왜?

 

  
▲ 시네마루로 바뀐 독립영화 전용관 올 1월, 영진위에 의해 사업자가 바뀌었다.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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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서 뭣들 하는 거요!"

 

군데군데 서 있는 사람이 열 명 남짓 되자 건물 관리원 아저씨가 굳은 얼굴로 다가온다.

 

"조금 있으면 회장님 나오실 텐데 이러면 나 같은 사람이 피해를 본단 말이에요!"

 

'단체행동은 하지 않을 거고 한 쪽에 조용히 있다가 12시면 헤어질 거'라 하니 얼굴에 더 깊은 주름살을 만들며 주변을 서성인다. 열시 반, 금방이라도 쇠 비린내 나는 녹물을 뚝뚝 떨어뜨릴 듯이 붉게 녹슨 벽 앞에 하얀 피켓 하나가 서 있다.

 

'나는 우리 영화가 무단 상영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우리영화를 무단 상영하지 말라 시네마루 입구에 서 있는 피켓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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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감독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니, 왜 그러시는 거죠?"

 

"'영화를 세상에 던지는 이야기'라 한다면 그 이야기가 소통되는 방식에서도 '영화가 세상에 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온당치 않은 방법으로 영화가 상영될 곳을 점유해 가고 있다면 그렇게 점유된 극장에 수많은 사람의 땀으로 뭉쳐진 이야기를 틀게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어떤 개인 날>의 이숙경 감독은 누군가 다가오자 피켓을 고쳐 잡으며 싱긋 멋쩍게 웃는다.

 

"팔 아프시죠? 제가 들게요."

 

젊은 총각, <장례식의 멤버> 백승빈 감독이 손을 내민다.

 

"5분만 더 하고."

 

둘의 얼굴이 환하게 일그러진다. 피켓 아래 쪽 붉은 글씨 '원하지 않습니다'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자 옆에 있는 사람이 읽고 있는 종이가 눈에 띈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가 관련 단체에 대한 비상식적인 개입을 반복하자 지난 17일 독립영화 감독 155인은 상영 보이콧을 선언했다. 지난 1월 영진위에 의해 사업주가 선정, 제1 독립영화 전용관이라는 미명 하에 태어난 시네마루는 상영 예정이었던 독립영화를 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국고에서 제작비가 일부 지원되는 한국 영화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작품을 사전 통보 하나 없이 무단으로 상영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들 크는 모습을 디카에 담다가 동영상으로 만드는 재미에 빠져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알게 된 '미디액트'의 최근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상영관'과 '교육프로그램 및 영상 기자재 대여'라는 하는 일만 다를 뿐, 올 초부터 시작된 돌발적인 운영진 교체와 파행 운영 등 미디액트와 시네마루의 모든 정황이 하도 비슷해 피식 웃음이 샜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진 우리 영화가 도둑질한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영화 편집권, 배급권 인정돼야 작품 몰입 가능"

 

극장에서 내려온 한 남자가 다급히 다가와 피켓 앞에 몇 초간 서 있더니 두리번거리고는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죽이며 말한다.

 

"도둑질한 극장은 문구가 좀 그런데요. 그건 좀 고쳐주시면."

 

곧이어 따라 내려온 극장 직원이 종이 한 장을 내민다. '극장 시네마루 측의 입장 해명'이다.

 

"감독님들과의 의사타진이 안 된 것은 일을 진행하던 담당자가 신혼여행을 떠난 상태여서그런 것입니다. 관련 팀장님과의 연락 및 다방면으로 아카데미와 접촉을 시도해서 기획전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아카데미의 영화를 무시해서 땜빵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영화를 섭외하지 않았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시네마루 운영진이 아무리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독립영화를 만드시는 창작자들을 진심을 다해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 안에 기획전을 시작해서  전용관을 알려야 하는 입장에서 감독님들의 의사 타진이나 아카데미 영화 관련 행사는 아카데미 배급 담당자에게 일임하는 형태였기에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시네마루 측 해명자료 중에서

 

'땜빵'이라는 단어가 여기 저기 보이는 종이를 대충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11시, 1층 레스토랑 자동문이 열리며 무스로 머리를 넘긴 검은 정장의 남자가 다가온다.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요. 극장이나 우리나 다 입주자 거든요. 저희에게 영향을 안 미치게 해 주셔야죠. 이 자리 말고 저 쪽이 더 눈에 잘 띌 거예요. 이 쪽으로 와 보세요."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을 몰고 간 그가 가리킨 자리는 '신문로 파출소' 바로 앞이다. 세 번째 1인 시위자였던 <그녀들의 방> 고태정 감독이 15분간의 피케팅을 마치고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넘긴 뒤 화단 쪽으로 걸어 왔다.

 

  
▲ "저 보다도 후배들이 더 걱정이예요." 일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고태정 감독
ⓒ 소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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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알았어요. 오늘 새벽 지인의 전화를 받고 하도 당황스러워서 헐레벌떡 뛰어 왔어요. 전에도 배급 상영은 영화아카데미가 추진했지만 그때는 감독과 함께 충분한 얘기를 나눴어요. 거칠게 다뤄지지 않을 거라는 아카데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요. 이젠 원장도 공석이고 전과는 많이 달라졌어요. 감독이 자신의 영화 상영을 보이콧 한다는 건 매우 소중한 기회를 마다하는 거예요. 하지만 해야죠. 편집권, 배급권이 안정 되어야 영화 내적인 것에 몰입할 수 있거든요. 아카데미 동문, 특히 후반 작업 중인 3기 후배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입니다."

 

그가 모자를 더 꾹 눌러 쓴다.

 

오전 11시 50분, 피켓 주위로 반원을 그리며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성명서를 읽는다.

 

'우리의 꿈을 강제 동원 시키지 말라'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조희문)는 지난 1월, 독립영화 전용관의 새 사업자로 ㈔한다협을 선정해 독립영화 전용관 <시네마루>를 개관하였다. 사업자 선정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지난 2월 17일 <독립영화감독 155인의 상영 보이콧 선언>이 이어졌다. 독립 영화감독들의 보이콧으로 상영할 프로그램을 수급하지 못한 시네마루 측은 선언에 동참한 한국 영화 아카데미 제작 연구생의 작품을 사전 통보 없이 땜빵 식으로 무단 상영하고 있다.

 

시네마루에서 무단으로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 아카데미 장편영화 제작연구과정 작품 8편은 일반 상업영화의 시스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여건 속에서도 작가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면서 만들어진 노력의 결과물이다. 단순히, 테입이나 파일 몇개로 저장할 수 없는 소중한 아이디어와 땀방울이 담긴 작품이기에 우리 14인의 감독들은 창작자에게 한마디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동원 상영하고 있는 영진위와 시네마루의 결정에 분노 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제작연구생들에게 작품을 연출한 감독으로서의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겠다는 횡포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의 소중한 꿈을 강제 동원하지 말라! 

 

이에 한국 영화 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감독 14인은

 

하나. 시네마루에서 무단 상영 중인 8편의 작품 상영을 보이콧 한다.

둘. 영진위와 시네마루는 배급의 경로를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며 그 책임자에게 사과를 촉구 한다. - '시네마루의 독단적 영화 상영을 규탄하며' 중에서

 

무채색의 외투를 걸친 그들이 기도하듯 손을 모은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사람, 눈을 감은 사람도 보인다.

 

영화가 영화 이외의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으면

 

  
▲ 시골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영화관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중,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야외상영관
ⓒ 유레카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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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중 <기타노 다케시감독의 야외상영관>이 내 마음 속 극장으로 남아 있다. 시골 들판 한가운데 있는 극장, 농사일을 마친 농부가 자전거를 타고 다가온다. 관객은 농부와 강아지 둘뿐이다. '농부표 주세요'라는 농부의 대사가 오래도록 입 안을 맴돌았다. 

 

일 년 전, 서울 한복판 이곳에서 내 마음 속 시골극장을 만났다. 상영관이 하나여서,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서 더 반가웠던 이 곳. 영화 <어떤 개인 날>을 처음 봤던 극장. 열 명 남짓한 관객을 앞에 두고 마음을 다해 이야기를 들려 주던 이숙경 감독 뒤에 내려진 스크린을 오늘은 만나지 못했다.

 

오늘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 로마의 원형극장처럼 생겼든, 구운 오징어가 널려 있는 뒹굴뒹굴 한 평짜리 골방이든 각자의 마음 속 영화관에서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 그들이 누구든 모두 다 자기 자리를 찾아 갔으면 좋겠다. 영화가 영화 이외의 수단으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열두 시다. 한두 번의 구호나 외침이 있을 법도 하건만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가볍게 눈인사만 나누고 자리를 떠난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 그들은 만나겠지만 오늘처럼 이 자리엔 그 어떤 외침도 없을 것이다. 이 곳을 가득 메운 구린내가 걷힐 수 있게 나는 그냥 그들의 조용한 저항을 지켜볼 거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영화 기 꺾기 프로젝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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