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아동 인권 실태] (1) 기록할 수 없는 아이들

태어났지만 유령처럼 살아야 한다면
부모 '미등록 신분' 대물림
국적법상 출생신고 불가능
교육·의료 소외된 수만 명
정부 아동권리협약 미이행

박종완 기자 pjw86@idomin.com  2019년 05월 21일 화요일

한국에서 태어난 필리핀 국적 클락슨(가명·6세)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 유치원에서 지내는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초등학교에 가겠지만 클락슨에겐 험난한 길이다.

필리핀 출신 이주노동자 아빠와 엄마는 한국에서 만나 클락슨을 낳았다. 출생신고를 못한 클락슨은 가족관계증명서 등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서류를 발급받을 수 없다. 클락슨 부모는 출생신고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허사였다. 클락슨은 친구들과 지금처럼 학교에서 어울려 지내고 싶지만 존재가 증명되지 않는다.

모두가 행복해야 할 가정의 달에도 미등록 이주아동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도 기록될 수 없는 아이들이다. 한국에 살면서 평생 존재를 입증해야 하고 출생과 동시에 죽음과 가장 가까이 놓이는 이들을 우리는 '미등록 이주아동'이라고 부른다.

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미등록'이라는 신분까지 대물림 받았다. 병원에 가는 일, 학교에 들어가는 일, 취업과 결혼을 하는 일 모두 고난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삶은 살아가는 것보다 생존에 가깝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지만 '국민'이 될 수 없는 미등록 이주아동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당시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후보 신분으로 경남이주민센터 5층 강당에서 열린 '이주민을 위한 정책 간담회'를 마친 후 이주민들과 한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인권 사각지대 놓인 존재 = 보편적출생신고네트워크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동은 현행 국적법상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 출입국관리법과 의료급여법상 건강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감기만 걸려도 3만 원을 웃도는 진료비를 내야 하고, 약값 역시 만만치않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출생과 동시에 한국정부 보호 밖에서 맴돌아야만 하는 셈이다.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미등록 이주민은 아이가 중증 질병에 걸리면 속수무책이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아동의 61%가 한 가지 이상의 질병을 앓고, 43%는 두 가지 이상의 병을 동시에 앓고 있다. 천식이나 청력장애를 비롯한 만성질환의 유병률도 10.9%로 국내 아동보다 높다. 최근 이주민건강협회를 통해 의료지원을 받은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사례를 보면 지난 2월 몽골 국적 2살 여아는 급성기관지염에 걸려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베트남 국적 2살 남아가 폐렴을 앓아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정부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몇 명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0년 '이주아동의 교육권 실태조사'를 통해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이 2만여 명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게 전부다. 이마저도 법무부가 파악한 '불법체류율(미등록 이주민 체류비율)'을 인권위가 단순계산해 얻은 수치라 정확도도 낮다.

▲ 지난 2017년 1월 경기 군포시 당동에서 열린 미등록 이주아동을 위한 '아시아의 창 어린이집' 개소식. /연합뉴스

◇아동권리협약 이행해야 = 국제사회는 이미 30여 년 전 정치·종교·인종·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의 건강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합의했지만 국내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UN은 1989년 총회를 통해 '아동권리협약'을 체결해 1990년 발효했다. 한국은 1991년 UN에 가입한 후 이 협약을 비준하면서 조약 당사국이 됐다. 이 협약의 24조 1항은 "당사국은 도달 가능한 최상의 건강수준을 향유하고, 질병의 치료와 건강의 회복을 위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아동의 권리를 인정한다. 당사국은 건강관리지원의 이용에 관한 아동의 권리가 박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는 정부 노력은 요원한 상태다. 이미 UN 권리위원회는 4차례에 걸쳐 한국 정부에 '아동권리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권고했다. 해당 권고에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가능한 최고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인권위 역시 2011년 "국내에 거주하는 미등록 이주아동은 의료급여법이나 국민건강보험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공공 및 일반 의료서비스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보건복지부에 의료접근권 개선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학습권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201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고쳐 미등록 이주아동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하지만 법으로 의무교육을 명시한 게 아니어서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미등록 이주아동에겐 취학통지서가 발부되지 않고 입학을 해도 출생등록이 안 돼 있어 학교 홈페이지에 가입할 수도 없다.

경남이주민센터 관계자는 "미등록 아동 처우개선은 시급한 문제다. 초저출산 사회에서 이주아동 배척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상적인 나라 운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한국사회를 위해서라도 이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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