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이윤주동지(전 이주노동자지부장)가 지난 3월 방글라데시에 가서 비두와 자말동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퍼왔습니다


<비두동지 만나고 온 이야기>
지난 10월 26일 비정규노동자 대회에 참가하였다가 연행되어 여수 보호소에 수감 되던 중에 불시에 추방된 비두 동지에 대한 추방 경위를 조사하여 후속 조치를 마련하고, 이주노동자 투쟁본부 활동을 하면서 만나 2년 전부터 사랑을 키워오던 한 방글라데시 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의 결혼을 수행(?)하기 위하여 지난 4월 28일 방글라데시 땅을 밟았습니다.

몇개월만에 만난 비두동지는 여전히 건강하고 밝고 친절했습니다. 오토바이 삼륜차를 타고 2시간을 달려 온 자말 동지도 비두의 집에서 만났었는데, 기력을 회복한 듯 밝아보였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모습은 그대로 였습니다.

비두동지는 현재 한 신발가게에서 일하고있는데, 주인의 양해를 구하여 약 8일여 되는 체류기간 내내 동행해주었습니다. 비두동지가 현재 다카(수도)에서 머물고 있는 신발가게 주인의 집과 비두동지의 시골집, 쥬엘의 집에서 머물면서,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마숨 동지와 꼬빌 동지의 집을 방문했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여러 명의 이주노동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6년간 일하다가 2001년에 돌아간 쇼쭐씨과 지난 3월 11일 마석 성생공단의 집에서 불시에 연행 추방된 우질바이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질바이와 함께 잡혀 추방된 조니씨는 하루에 13시간 14시간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악착같이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갑작스런 기후변화와 일감 상실로 인한 스트레스로 몹시 아프다하여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의 안부를 묻기위해 우산으로 햇빛을 피해가며 휘정휘정 먼 길을 걸어 온 나딤의 아버지와 이슬람씨의 아버지도 만났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각각 아들과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바리바리 싸주는 방글라데시 전통음식(망고 장아찌, 각종 향신료, 일종의 전통 떡 등)과 약품들, 옷가지들을 짊어지고 와 배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카나 시골이나 툭하면 정전이 되고, 그 흔한 AA 사이즈 밧데리 하나 사기 위해 이틀이나 걸렸지만, 만난 사람들로부터 과도하리만치 배려넘치는 다사로운 정감을 흠뻑 느끼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각설하고, 많은 동지들이 비두동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으므로 비두동지의 현황을 간략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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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두동지 근황>

- 지난 12월 31일 아침, 인천공항에서 4명이 동행한 가운데 (3명은 출입국직원이라고 본인을 밝혔는데, 1명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함) 비행기를 탔으나, 방글라데시 현지 기후 사정 때문에 홍콩으로 회항하였다가 1일 오후 14시경에야 방글라데시에 도착하였습니다.

- 귀국 후 4일간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비두의 가족과 친척 등이 발벗고 나서서 구속 중의 고문 등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고문은 다반사라고 합니다)

- 유력 일간지에 비두의 연행장면 사진을 실은(웃통이 벗기워진 채 번쩍들려 차에 태워지는) 기사가 났습니다. 한 방글라데시 노조 지도자가 한국에서 노조운동을 하다가 한국 경찰에 의해 추방되었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 가족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자말과 함께 풀려났지만 불구속 입건되어 재판을 계속 받았습니다.

- 비두의 판결문에 의거해 보면 한국 정부가 문서를 통해 주장한 혐의는, "불법체류자이면서 노조 활동까지 하고 공동체를 구성하여 대표활동을 하였다", "한국 법을 무시하고 한국 사회에 혼란과 혼돈을 야기하였다", "한국에 대한 방글라데시의 위신을 훼손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신병을 인계받았던 공항경찰에 의하면 비두를 연행하였던 4명의 중의 한 명이 "비두는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했다고 하며, 이 주장은 증거불충분으로 재판과정에서 일찌감치 기각되었다고 합니다.

- 한국에서 걱정한 많은 동지들의 우려와는 달리, 이미 지난 2월 28일에 무혐의로 재판은 종결처리되었습니다. 판결문에 의하면 한국정부가 주장한 바가 모두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두동지가 재판받은 다카법원)

- 4월 1일 위에서 말한 결혼식 준비가 한창인 가운데, 한국에서 날아든 연락은 샤말동지가 네팔로 또 불시에 추방되어 공항 경찰서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두동지와 저는 네팔로 가는 비행기편과 비자발급에 대해 알아보며 내전중인 네팔 상황에서 샤말동지가 다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 마침 다음 날 샤말동지가 무사히 집으로 귀향했다는 소식은 반가왔지만, 여권도 없이 무작정 네팔로 끌고 가 신병을 인수할 것을 종용했던 한국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의 주장을 네팔 출입국관리국이 인정하지 않고 조사를 하기 위해 유치했던 사실과 한국 정부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어 모든 것이 기각되고 귀가조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두동지는 한국정부는 가난한 나라 정부는 생각도(머리도) 없는 줄 아는가 보다며 기가 막혀 했습니다.

- 비두동지는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 많은 돈을 지출했었습니다. 행정과정에서 비공식적 비용이 드는 것은 그 사회의 관행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보고들은 것만 해도 ; 결혼신고를 하러 이맘샤이브(성직자)에게 가도 웃돈에 바가지까지 요구, 4인 가족이 살 수 있는 단칸방의 월세가 20만원이라면 경찰월급은 17만원에 불과하다는 경찰의 푸념, 구멍뚫린 양말을 까닥거리며 한국엔 변호사의 지위가 어떠냐고 묻는 변호사의 너스레 등) 또한 동생들이 홀어머니를 근근히 모시는 자말동지의 가정형편 때문에 두 사람의 제 비용은 비두동지의 집에서 대었다고 합니다.

- 재판과정에서 총 150여만원이 들었다고 하는데, 마침 한국에서 동지들이 모아 준 돈(이주지부 50만원, 농성단 100만원, 공공연맹 사무처 동지들 82만원)과 비두 동지 통장 잔액(약 57만원)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비두동지는 특유의 억양으로 "괜찮아요"를 연발하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방글라데시에서의 새로운 활동에 보탬이 되도록 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기어이 전달했습니다. 추후 비두동지는 자말 동지가 이래저래 개인적으로 들인 비용(약 10만원 가량)에 얼마간의 돈을 더해 자말동지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 비두동지는 현재 가족들의 우려 때문에 고향 동네 형님이 운영하는 신발가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있는데, 실상 가족과 이웃들의 그물망식 감시체계에 있는 것이기도 하죠. 1주일에 한 번씩(휴일인 금요일) 고향 마을에 간다고 합니다.(4-5시간 소요)

- 그런데 비두동지는 벌써부터 고향에서 젊은이를 주축으로 하여 6개 마을조직 연합으로 진보적 공동체(Progressive community)를 조직하고, 마을 내 소수자(과부, 고아, 장애인, 극빈가정)를 위한 사업을 펼치고자 합니다. 현재 발기인들이 20여명 모인 상태이며 오는 4월 7일 정식으로 발족할 예정이고, 이미 첫 사업으로 6개마을 연합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고향마을 시장통에서 만난 비두동지의 고등학교 은사는 "비두를 왜 그렇게 쫒겨나게했냐"고는 했지만 유창한 영어와 환한 미소로 시종 웃음을 만들어 주었고, 공동체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호기심과 환대로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저는 진심을 담아 한국의 많은 동지들이 비두를 잊지 않고 있고 어디에 있으나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 비두동지의 가족들을 만나 가족들이 받았을 충격과 고통을 다소나마 위안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꼬빌 동지 어머니도 꼬빌 동지가 2002년에 화성보호소에 갇혀 있을 때 원인도 모른채 보름간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는데, 하루는 달게 잠을 자고 일어나서 이상하다 싶었더니, 샤힌(동생)이 그제서야 '사실은 형이 21일간 단식을 하다가 어제 풀려났다'고 했다고 합니다)

- 자말동지는 지금 다시 다른 나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있는 것이죠. 한국에서 2년 반동안 일하면서 빚을 겨우 다 갚고 나자 추방된 것이기 때문에, 모아둔 돈이 없습니다. 자말 동지를 비롯하여 추방되거나 혹은 귀환한 친구들은 다시 방글라데시 사회에 섞이기 위해 노력들 하고 있습니다.




(*자말과 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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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 노조 활동가들을 속속들이 잡아다 추방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고용허가제'니 뭐니하며 법 테두리 안으로 개편시키는 것과 상관없이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에 다름아닙니다.


* 방글라데시나 네팔의 행정체계가 한국보다 후진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양식(良識)마저 없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법무부의 오만하고 후안무치한 행위는 국제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 비두동지와 샤말동지는 어디에 있어도 자신의 양심과 인식을 실천할 사람들입니다. 저는 비두동지에게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서둘지 말고 천천히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자신의 걸음을 걷다가도 뛰어야 할 때 뛸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셋이 만나려면 그야말로 '인터내셔날'하게 만나야겠다"며 농담하고 웃었지만,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게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길을 걸어갈 것이고 또한 서로를 독려하고 지켜주는 굳은 동지가 되자고 한 번 더 다짐했습니다.

# 동생의 디지털 카메라를 빌려 600여장이 넘는 사진을 담아왔습니다. 덕분에 다른 동지들과도 공유하기 쉽게 되었습니다. 사진첩을 만들어 함께 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