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의 이방인] “왜 세금을 불법체류자 자녀에 쓰나” 여론 못 넘은 이주아동법안

발의 때마다 국회의원에 항의 빗발

2만명 무국적 ‘세상에 없는 존재’

건보 혜택 없어 아프면 큰돈 들어

“아동 보호받아야” 유엔 협약 불구

권리보호 논의 제대로 안 이뤄져

중국동포 유학생 박동찬씨, 미국 출신으로 한국에서 블로그를 운영 중인 야스미나 피에르씨, 가나에서 온 대학원생 페르디난도씨, 터키 출신 한국외대 교수 카디르 아이한씨, 스리랑카 출신 결혼이주여성 이레샤 페라라씨, 네팔출신 이주노동자 우다야 라이(왼쪽부터 시계방향)씨가 한 자리에 모였다. 류효진기자

경기 남양주 마석가구공단에 사는 혜인이와 연아는 여덟 살 동갑내기다. 둘 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국적이 없다. 엄마, 아빠가 필리핀에서 온 불법체류자여서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친구의 부모 모두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토요일도 격주로 출근하기 때문에 둘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근처 남양주시외국인복지센터의 한울타리지역아동센터에서 지낸다. 부모가 늦은 저녁 퇴근할 때까지 둘은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국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이 아이들은 학교장 재량에 따라 초등학교에 입학해 다니고 있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아파도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 한다. 감기만 좀 오래 앓아도 10만원이 든다. 단속에 걸려 추방될까 봐 또래 친구들이 좋아하는 놀이동산 한 번 못 갔다. 무국적 상태의 불법체류자 자녀들은 중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드물고, 성폭력 등 각종 폭력을 당해도 신고조차 할 수 없는 처지다.

결국 혜인이 엄마 아일린(39)씨는 올 가을 혜인이만 필리핀 시댁으로 보내기로 했다. 부부는 남아 좀 더 돈을 벌 생각이다. 연아 엄마 파티마(39)씨는 “연아가 3학년이 되면 필리핀으로 데리고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더 편한 이 아이들은 “필리핀에 안 가면 안 되느냐”는 말을 자주 한다. 아일린씨는 엄마, 아빠도 없이 혼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필리핀에서 할머니와 지내야 하는 어린 딸 걱정에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현재 국내에는 약 2만명의 불법체류자 자녀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불법체류 부모는 단속 대상이라 하더라도 아동에게만은 교육, 의료 등 기본적 권리를 보호해 주려는 시도가 그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거센 반대 여론에 제도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18대 국회인 2010년 10월 김동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이주아동권리보장법안을 발의했었다. 이주아동이 부모의 국적 등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건강하고 안전하게 성장하는 데 필요한 생활을 누릴 권리를 규정한 법안이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이주아동에게 교육, 의료급여, 최저생계 유지와 보육 등을 지원하도록 했다. 아울러 이주아동에 대해서만은 ‘법무부 장관이 한국에 체류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로 규정해 추방당하지 않고 국내 체류가 가능케 했다. 당시 김 의원은 “태어나자마자 불법체류자 신세인 무국적 신생아 2만명 이상이 법적 관리와 보호 없이 방치되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1991년에 비준한 유엔의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이주 아동의 권리 보장 및 보호 제도를 도입해 인권의 사각 지대를 해소하려 한다”고 발의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심의된 후 진척 없이 18대 국회가 막을 내리며 자동폐기됐다.

이어 19대 국회 때인 2014년 11월과 12월에 정청래 임수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각각 아동복지법 개정안과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앞서 김동성 전 의원이 발의했던 법안과 핵심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결합권 보장 차원에서 불법체류자 자녀가 의무 교육을 받는 기간 동안 부모 중 한 명은 강제 추방을 유예하자는 식으로 좀더 진전된 정도였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엄청난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당시 정청래 의원실 관계자는 “법안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반발 여론이 거셌다. 특히 당시 같은 당 의원이나 지지자들조차 이건 아니라며 반대 문자를 수 천 통 보내고 항의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와 반대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법안을 반대하는 이들은 ‘왜 불법체류자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낸 세금을 써야 하느냐’ ‘아이들 권리를 보장하다 보면 불법체류자 부모까지 한국에 계속 머무를 명분을 만들어 주고 불법체류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자스민 전 의원 인신공격 시달려

반대 여론 확산엔 ‘이자스민 변수’도 작용했다. 실제 법안 발의는 민주당 의원들이 했는데도, 네티즌 사이에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 여성으로 사상 첫 국회의원이 된 이자스민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한 것으로 알려져 반대 여론에 기름을 붓는 상황이 됐다. 그에게 “당신 나라 필리핀으로 돌아가라” “왜 필리핀 여자를 국회의원 시키느냐”는 인신공격이 빗발쳤다.

이 전 의원에 대한 공격은 같은 해 4월 그가 불법체류자 자녀 등록, 의무교육 보장 등을 담은 이주아동권리보장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을 때부터 시작됐다. 이 법안은 같은 해 12월 여야 의원 22명이 함께 발의했음에도 논의조차 제대로 안 된 채 자동폐기됐다.

아동은 아동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보호 받아야 한다는 유엔 협약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 사회는 불법체류자 자녀를 ‘세상에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로 인해 어디까지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을지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적과 상관없이 인류의 미래여야 할 아이들, 심지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마저 품지 못하는 한국이다.

남양주=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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