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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이 돼서도 당신들의 도시 ‘바깥’에 갇혀 있다

등록 :2018-04-08 10:57수정 :2018-04-0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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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기획연재
고스트 스토리 ③ 부르혼의 혼
2003년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12월18일) 서울 종로구 종로타워 앞에서 열린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동포 추모제’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그해 강제단속 중 사망한 사람들의 영정을 들고 있다. 맨 왼쪽 영정 속 얼굴이 우즈베키스탄인 부르혼.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2003년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12월18일) 서울 종로구 종로타워 앞에서 열린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동포 추모제’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그해 강제단속 중 사망한 사람들의 영정을 들고 있다. 맨 왼쪽 영정 속 얼굴이 우즈베키스탄인 부르혼. 김진수 <한겨레21> 기자 jsk@hani.co.kr

2001~2017년 인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 195명(1회 ‘죽음이 하는 말) 중엔 외국 국적 9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의 죽음에선 가난한 노동을 전 지구가 값싸게 부리는 시대의 단면이 펼쳐진다. 노동의 지구적 이동과, 분열하는 국적 정체성과, 가난한 삶과 죽음의 상관관계가 그들이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흔적에서 희미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밥상을 차리고, 우리의 공장을 돌리고,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면서도 ‘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비로소 목소리를 입는다.

나, 부르혼.

나(우즈베키스탄·2003년 사망 당시 50살·남)는 ‘당신들 바깥’에서 죽었다. 살아 있을 때 당신들의 ‘안’으로 건너가지 못한 나는 죽어서도 당신들의 도시에 내려앉지 못하고 ‘밖’을 떠다니고 있다.

혼에도 기척이 있는가. 어둑해지는 목재공장(인천 동구 송현동) 구석에서 개가 목청 높여 짖었다. 나는 살아 있을 때부터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거부당하고 단속당하고 추적당했다. 나는 혼이 된 뒤에도 도시가 으르렁거릴 때마다 움츠러들고 졸아들었다.

나, 구겨진 자

공장 사장이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나와 개를 진정시켰다. 15년이 지났지만 사장(현재 46살)은 내가 죽었을 때보다 여전히 어렸다. 그해(2003년) 겨울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 목재공장에 왔었다. 낯선 도시에서 내가 해고되자마자 찾아갈 데는 조카가 일하는 이 공장뿐이었다.

한국 정부가 대규모 강제단속(1993년 시행 뒤 ‘노예연수제’란 비판을 받아온 산업연수생제를 고용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당시 미등록 상태의 이주노동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추방)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쫓겨났다. ‘불법 외국인의 고용주도 처벌’이 공표되자 회사(목재공장과는 다른 곳)는 곧바로 짐을 싸게 했다. 입국(7월·관광비자) 4개월 만에 나는 거처를 잃고 ‘도망자’가 됐다.

사장이 컨테이너로 만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내가 혼으로 떠돈 햇수와 같은 나이의 화장실(목재공장은 부르혼 사망 몇 개월 전 현재 장소로 이전)이 부서진 나처럼 낡아 부서질 듯했다. 공장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대로 있진 않았다. 목재공장 마당에 목재가 드문드문했다. 야근 물량도 없었고, 잔업거리도 없었다. 한국인 아닌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때의 나보다도 나이 많은 한국인(모두 60살 이상) 몇 명만 일했다.

사냥하는 개는 냄새를 뒤쫓았다. ‘불법체류’를 냄새 맡고 쫓아오는 추적의 공포에 떨 때마다 나는 ‘짖는 소리’를 들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나를 둘러싼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때로 숲에 몸을 숨긴 맹수의 기척 같았다.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 중동부)에서 5천달러를 브로커에게 주고 나이 오십에 한국에 왔다. 빚도 갚지 못한 채 돌아가면 나와 내 가족의 현재는 끝이었고 미래는 오지도 않을 것이었다. 짐 가방을 끌고 우즈베크 친구들이 일하는 공장을 찾아다녔으나 일을 얻지 못했다. 구직을 거절당했던 이 공장으로 일주일 만에 되돌아왔을 때 조카 친구가 사장의 말을 다시 전했다.

“지금 불법사람 못 쓴다. 공장 기숙사에도 들어오면 안 된다.”

‘안’을 허락받지 못한 내게 ‘밖’은 너무 추웠다. 그보다 무서웠다. 조카 친구에게 “내일 귀국한다”고 말한 뒤 돌아섰다.

시간이 갉은 화장실 문은 15년 전의 기억을 새겨서인지 여닫을 때마다 뻐걱댔다. 동파를 막기 위해 켜둔 난로가 가스를 피워 화장실이 매캐했다. 그날이나 지금이나 이 화장실은 누군가의 마지막 장소가 되기엔 너무 남루했다. 쫓겨 다닌 지 10일째 되던 날(2003년 11월25일 오전 2시께) 나는 이 화장실에서 죽었다. 화장실 문에 줄을 걸어 목을 맨 채로 공장 사람들에게 발견됐다. 며칠 동안 만지작거려 꾸깃꾸깃해진 비행기표가 꾸깃꾸깃해진 내 가슴에서 나왔다.

나는 단속 전후로 목숨을 끊은 네번째 사망자였다. 아픈 어머니에게 더는 치료비를 보내지 못한다는 절망으로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진 다르카(스리랑카·11월11일 당시 31살·남)와, 1천만원을 빌려 동생과 입국했으나 400만원의 빚을 남긴 채 “차라리 한국에서 죽겠다”며 목을 맨 비꾸(방글라데시·11월12일 당시 34살·남)와, 강제단속으로 어쩔 수 없이 탄 블라디보스토크행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안드레이(러시아·당시 37살·남)가 먼저 혼이 돼 나를 기다렸다.

<b>지난 17년간 인천의료원 거쳐 간
무연고 외국인 사망자 9명 모두 
화교 또는 가난한 나라 노동자들
지구적 이주 관문 된 한국 현실과 
그들 국적에서 엿보이는 삶의 시간

2003년 강제추방 절망해 목맨 부르혼 
그 화장실은 15년 전 그대로 남루
산재·병원비 거부당한 중국 동포
병 얻고 가족 해체된 네팔 노숙인
‘우리’ 지탱하며 배제당한 존재들

고향의 가난한 가족은 나를 데리러 올 형편이 못 됐다. 팩스로 위임장을 받은 한국인들(양혜우 당시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소장)의 도움으로 내 몸은 방부 처리(대학 장례지도학과 학생들 실습)돼 비행기 화물칸에 실렸다. 단속 열흘 만에 ‘연행 1233명과 강제출국 606명’을 ‘성과’로 발표한 정부는 장례 이틀 뒤(12월8일)부터 2차 단속에 돌입했다.

화장실을 나온 사장이 붉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를 받아주지 않은 그가 미워 이 화장실에서 죽은 것은 아니었다. 내가 죽을 수 있는 장소도 이곳밖에 없었다. “단속반이 공장마다 뒤지며 매일 외국인들을 잡아가던”(사장) 시절이었다. 내가 죽은 뒤 내 조카와 동료들도 모두 공장을 떠났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떠올릴 사장은 “그나마 사업이 가장 잘되던 그때”가 그리울지도 몰랐다. 이 화장실에 매여 문과 함께 부식돼온 나는 여전히 공장 안으로 흘러들지 못한다.

2003년 11월 강제단속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인 부르혼이 목을 맨 인천의 한 목재공장 화장실. 1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화장실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루하다. 이문영 기자
2003년 11월 강제단속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인 부르혼이 목을 맨 인천의 한 목재공장 화장실. 1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화장실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루하다. 이문영 기자
나, 사람 혹은 물건

녹슨 화장실로부터 2.2㎞ 떨어진 공장에서 내(중국 동포·2003년 3월 당시 38살·남)가 응급실(호흡마비·저산소성 뇌손상)로 실려갔다. 랴오닝성 선양시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이 도시의 고가도로 옆 공장(남구 도화동)에서 일했다. 공장 사장은 ‘사정이 어렵다’며 병원비를 내지 않고 연락을 끊었다. 공장 간부는 ‘사장님 소식을 모르는데 어떡하냐’며 책임을 미뤘다. 나는 사람이지만 수입되는 물건처럼 ‘도입’(이주노동자 고용 행정용어)됐다. 사용가치가 없어지면 쓸모없는 물건처럼 외면됐다. 형도 안치료를 낼 돈이 없었다.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형을 대신해 형의 친구가 대필로 ‘추후 납부’(빌려준 돈 받으면 병원비부터)를 약속했다. 나는 죽은 지 한달이 다 돼서야 화장장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도시에서 9차례(2001~2017년 인천광역시의료원 무연고 사망자 195명 중 9명) ‘연고 없는 외국인’으로 ‘처리’됐다. 200여년 전 힘센 나라들(일본·청나라·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가 각국 조계 설정)이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와 그들 필요에 따라 구성한 도시가 인천(▶2회 죽음의 지리학)이라고 들었다. 이제 이 도시에서 홀로 죽은 나는 그때부터 정착한 사람들의 후손(대만 화교 2명, 중국 국적 1명)이거나, ‘재외국민’으로 찾아온 모국에서 ‘그냥 외국인’인 자들(중국 동포 1명)이거나, 힘없고 가난한 나라(우즈베키스탄 1, 몽골 1, 네팔 1, 미얀마 1, 우간다 1명)에서 돈 벌러 온 노동자들이었다.

죽음의 과정이 삶의 고단을 말해주는 나는 왜 모두 ‘그 나라 출신들’인가. 왜 그 나라들에서 온 나(2016년 말 인천의 등록 외국인 5만9103명 중 중국 2만5665명·43.4%→베트남 6536명·11.0%→필리핀 2852명·4.8%→대만 2609명·4.4%→인도네시아 2047명·3.4%→타이 1920명·3.2%→방글라데시 1010명·1.7%)만 이 도시에서 ‘무연고 외국인’으로 죽었나. 왜 미국인(998명·1.6%)과 일본인(913명·1.5%)과 영국인·캐나다인(272명·0.4%) 중엔 내가 없나. 이 도시의 공장을 돌리며 가장 거친 노동을 떠맡아온 나(남동공단이 있는 남동구 1만2056명·20.3%→검단공단·목재단지가 있는 서구 1만1627명·19.6%→부평공단이 있는 부평구 1만933명·18.4% 차례로 거주)는 왜 여전히 ‘외국인 새끼’인가.

나(대만 화교·2011년 당시 51살·남)는 ‘소속 밖’에서 죽었다. 중국 다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나이 열여섯(1939년)에 이 도시로 왔다. 나라가 대륙과 섬으로 쪼개졌을 때 아버지는 섬을 선택했다. 아버지의 다섯 아들딸 모두 한국에서 나서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았지만 모두 아버지를 따라 대만 사람으로 살았다. 200여년 전 ‘조약국’(청)의 일원으로 이 도시에 정착한 선대들은 시간이 흘러 중국-대만-화교(국적 유지)-화인(거주국으로 귀화)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한국 법·제도의 사각을 들고났다. 차남인 나만 중학교까지라도 공부할 수 있었다. 어떤 정체성도 붙들어주지 못한 나는 오직 가난에 붙들렸다. 내가 죽었을 때 소식이 닿은 가족은 형뿐이었다. 형은 내 주검의 인수를 포기했다. 형은 거리에서 먹고 잤다.

나(대만 화교·2015년 당시 58살·남)도 ‘거리 소속’이었다. 냄새와 냄새 사이에서 죽었다. 냄새는 두 세계를 구분하는 무형의 장벽이었다. 나는 백화점(남구 관교동) 지하 2층 주차장에서 병원(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옮겨졌다. 지하 1층에선 고픈 배를 자극하는 음식 냄새들이 내려와 나를 흔들었고, 1층에선 수입 향수들이 내 몸의 악취까지 덮을 아름다운 향기를 풍겼다. 허기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내가 그곳을 찾아간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문학경기장 주위에서 한국 노숙인들 틈에 끼어 살다 백화점에 주차된 자동차들 틈에 끼어 죽었다. 경기장을 넘어오는 함성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는데, 백화점을 밝히는 웃음소리는 너무 화창했다. 내 몸에 묻은 거리의 냄새들이 고객들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내가 끼어들 수 없는 세계를 확인시켰다.

나, 지구의 피고용인

나(네팔·2011년 당시 40살·남)는 서울에서 노숙하며 만난 장씨 할아버지에게 무료식당(동구 화수동 민들레국수집)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따라왔다. 1990년대 초 돈을 벌려고(산업연수생) 한국에 왔는데 심장에 병이 생겼다. 아픈 뒤로 더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고, 돈 대신 병만 챙겨 귀국할 수도 없었다. ‘덩치 크고 피부 검은 네팔 노숙인’이 한국인들 눈에 ‘신기한 존재’로 비칠 때마다 나는 점점 커지고 점점 검어졌다. ‘새까만 공룡’의 크기로 부풀기 전 국수집이 얻어준 방에 누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친구를 만나고 온 날 밤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엷은 웃음을 띤 얼굴”(서영남 민들레국수집 대표)로 나는 죽었다.

내 몸은 네팔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이 도시에서 뼛가루가 됐다. 나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병을 얻고, 일을 잃고, 송금을 못 하면, 내 어깨에 생계를 올려둔 고향의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값싼 노동’의 굴레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고 죽었다. 나(미얀마·2013년 변사·남)는 나이 육십에 한국 배 선원이 된 지 7개월 만에 죽어서 땅을 밟았다. 나(몽골·2013년 당시 28살·남)는 직업전문학교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뒤 경기도 파주에서 일하는 동생에게 인도됐다. 나는 어느 나라에서나 싼값으로 고용돼 저렴하게 사용됐다. 한국(이주노동자의 아시아 주요 송입국)은 노동의 지구적 이주 관문이 된 지 오래였다. 나의 죽음도 그 경로 위에서 발생했고, 나의 노숙(서영남 대표 “2010년 이후 국수집을 찾는 외국인 홈리스들이 부쩍 많아졌고 칠레·브라질·인도 등 출신국도 다양해졌다”)도 그 길 위에서 ‘글로벌’해졌다.

나는 계속 죽었다. 내(부르혼) 죽음에 절망한 나·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380일(2003년 11월15일~2004년 11월28일) 동안 농성했으나 나는 끝없이 죽었다. 단속반을 피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넘다 추락사(2006년 인도네시아인 누르 푸아드)했고, 구금된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불이 났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 사망(2007년 중국인·동포·우즈베키스타인 등 10명)했다. 강제추방을 앞두고 머리에 스파이크건(못 박는 총) 33발을 쏴 스스로(2008년 베트남인 웬반탄)를 죽였다. 안전장비 없이 돼지 똥을 치우다 가스에 질식(2017년 네팔·중국·타이인 4명)해 죽었고, 사장 동의 없인 직장을 옮길 수 없는 제도(고용허가제 대표적 독소조항)에 절망하며 목을 맸다(2017년 네팔인 깨서브 스래스터).

인천은 내가 이주노동의 전 업종에서 일하는 도시(김기돈 전 한국이주인권센터 사무국장 “한국 이주 현장의 축소판”)였다. 이 도시에서 나는 밭(농업 이주노동)을 갈고, 가축(축산 이주노동)을 기르며, 배(선원 이주노동)를 타고, 공장(제조업 이주노동)에서 일한다. 나의 노동 없이 당신들의 밥상은 차려지지 않고, 도시의 편리는 영위되지 않으며, 가족·국가의 재생산(결혼이주)도 위태롭다. 그렇게 당신들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으나 나는 당신들의 ‘우리나라’에서 환대받은 적이 없다. ‘더는 넘어오지 말라’는 금이 언제나 내 발 앞에서 직선으로 반듯하다.

나, 부르혼.

혼이 돼서도 당신들 ‘바깥’에 갇혀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9603.html#csidx8ae7a160a6e83a098e8d151e7445ec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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