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 산재 적용 천차만별…다쳐도 고용주는 '나 몰라라'

기사입력 2019-06-07 10:32 l 최종수정 2019-06-07 11:05


네팔인 21살 A 씨는 지난해 12월 비전문 취업비자(E-9)로 한국에 입국해 강원도 홍천의 한 농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던 그는 지난 3월 고용주로부터 트랙터를 운전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운전방법을 모르던 A 씨는 거부했지만, 고용주는 지속해서 운전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결국 제대로 기술을 익히지 못한 채 트랙터에 오른 A 씨는 사고를 당했고 척추뼈가 골절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다친 몸만큼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고 이후 고용주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고용주는 사고를 당한 뒤 '네가 잘못해 다쳤으니 병원비는 네가 내야 한다. 월급을 모아둔 통장을 나에게 주고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A 씨를 상담한 의정부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류지호 팀장은 "다행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 A 씨가 통장을 넘겨주지는 않았지만, 고용주는 끝까지 책임을 거부하며 그가 재활을 위해 머무른 요양 병원 조기 퇴원도 강요했다"고 어제(6일) 전했습니다.

류 팀장은 "농어촌 영세사업장 고용주는 이주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해도 '우리 사정도 너무 어렵다'며 치료비 제공 등을 거부하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지적했습니다.

고령화로 일손 부족이 심각한 농어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귀한 존재가 된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A 씨의 사례처럼 작업장에서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현재 고용허가제상 농축산업 분야 5인 미만 사업장은 산업재해 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재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에도 근로기준법상 산재 적용은 가능하지만 지원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류 팀장은 "농어촌 영세 사업장은 산재 적용 대상이 아니라서 가입 의무도 없고, 가입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도 잘 모른다"며 "이 때문에 농촌 사업장 고용주는 물론 이주노동자도 산재 제도에 대해 정보가 전무한 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산재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이 농어촌 일터에서 다치는 일은 빈번하지만 제대로된 치료비와 휴업 급여를 받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지난 2013년 국가인권회의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조사 대상자 161명 가운데 산재로 다치거나 아팠던 경험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57.8%에 달했습니다.

작업장에서 다쳤다고 응답한 이주노동자 가운데 58.7%는 본인 돈으로 병원에 갔다고 말했으며 고용주가 돈을 내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응답은 18.5%에 불과했습니다.

류 팀장은 "산재 가입 의무가 없으니 농어촌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산재가 발생하는지 정확한 통계도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관련 단체들은 정부가 농어촌 외국인 노동자 산재보험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며 이들의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외국인 이주·노동운동협의회(외노협)는 지난 5일 성명을 통해 "고용노동부는 산재보험 전면 적용을 미루고 있으며, 이로 인

해 이주노동자들의 상당수는 심각한 부상을 해도 적절한 치료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외노협은 "정부는 건강보험 전면 적용을 통해 외국인에 대한 보험료 징수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의료와 안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책임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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