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보료 내온 외국인, 체류자격 변경돼도 가입자격 유지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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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1.05.27. 오후 4:44
고용허가제로 입국해 5년간 납부…임금체불로 G-1자격 체류
공단 "단기체류 남용 우려"…인권위 "사회연대 원리 훼손조치"

[CBS노컷뉴스 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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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체류 자격으로 국내 입국해 수년간 건강보험료를 낸 외국인이 '단기체류자'로 자격이 변경됐다는 이유로 국민건강보험(건보) 자격을 빼앗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판단이 나왔다.

인권위는 25일 보건복지부 장관과 건보공단 이사장에 대해 장기체류 자격을 받고 입국해 건보 가입자가 된 외국인이 건보 가입요건이 안 되는 체류자격으로 바뀌는 경우에도 건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규칙'을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앞서 A씨는 고용허가제(E-9)를 통해 지난 2015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직장건강보험에 가입해 약 5년간 건보료를 납부한 그는 산업재해로 입원치료를 받던 중 회사의 부도로 임금을 못 받게 됐다. 임금체불 문제를 풀고자 노력하던 중 체류자격이 만료된 A씨는 지난해 8월 초부터 기타(G-1-4) 체류자격으로 국내에 머물게 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A씨는 건보공단에 건보 유지 또는 재가입에 대해 문의했지만, 공단 측은 '체류자격이 기타(G-1)인 외국인 중 인도적 체류자와 임신·출산 등 인도적 사유에 따라 배려가 불가피한 사람만 지역건보 가입이 가능하다'며 거부했다. A씨는 "상황에 대한 판단 없이 체류자격 변경을 이유로 건보 가입을 불허한 것은 국내 장기체류 중인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 조사과정에서 공단 측은 "기타(G-1)는 법무부 장관이 인정하는 사유가 발생한 경우 단기적으로 체류를 인정한 것으로 이러한 외국인에게 건보 가입을 허용한다면 건보의 기본원리인 보험의 원리 및 사회연대의 원리가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건보 가입을 위해 해당 체류자격 신청을 남용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신중히 검토할 문제"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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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는 건보 제도가 헌법 34조 상 '국가의 사회보장 증진 의무'에 해당돼 헌법 10~22조에서 보장된 인권을 침해당하거나 차별을 당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해당 진정은 각하하면서도 이 사안이 '세계인권선언'과 'UN 사회권규약' 등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고 내용을 검토했다.

인권위는 "우리나라와 가장 유사한 형태의 건보제도를 운용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3개월 초과 체류자격으로 입국해 등록한 외국인은 입국 직후부터 건보 의무가입 대상"이라며 "우리나라의 기타(G-1) 자격에 해당하는 일시비호자, 가체류허가자 또한 입국 시부터 의무가입 대상자로, 일단 가입자가 된 외국인은 체류자격이 3개월 이하 체류자격으로 변경되어도 가입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고 짚었다. 이밖에 독일, 프랑스, 캐나다, 영국 등도 장기체류 외국인에 대해 건보 가입을 의무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인권위는 헌법 제6조를 들어 외국인도 국제법과 조약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지위가 보장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국제인권법상 차별금지 원칙과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사회보장을 통한 건강권 보호는 외국인에게도 '비차별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권위는 "피해자는 건보 가입이 가능한 체류자격으로 입국해 건보에 가입했다 일정한 사유로 체류자격이 변경되었을 뿐"이라며 "일시방문을 목적으로 한 입국자와 동일하게 대우해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해당제도 취지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공단 측의 우려와 달리 기타(G-1) 체류자격 자체가 법무부 장관의 예외적 승인이 있는 경우에 국한되는 만큼 건보 가입을 목적으로 남용될 여지는 크지 않다고 봤다. 오히려 기존 가입자로 건보료를 꾸준히 납부해온 외국인이 부당하게 건강상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건보에서 사회연대 원리는 질병 등이 누구에게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담능력만큼 기여금을 납부하고 필요 시 보험급여를 받는 것에 기초한 것"이라며 "건보 가입자로 성실히 기여금을 납부해오던 장기체류 외국인이 체류자격 변경을 이유로 가입자격을 상실하고 정작 필요한 시기에 보험급여를 받지 못한다면 이는 건보의 사회연대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국내 체류 외국인이 취업관련 체류자격으로 건보에 가입했어도 체류 중 질병·사고·산재 등으로 취업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기존 체류자격으로 지역가입자가 될 수 있다"며 "허가된 체류자격 동안 부담능력만큼 기여금을 납부하는 의무를 수행해왔는데도, 체류자격이 기타(G-1)로 변경됐단 이유로 건보 지역가입이 제한되면 필요할 때 급여를 받지 못하는 의료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장기체류 자격을 받고 입국해 건보 가입자가 된 외국인이 건보에 가입할 수 없는 체류자격으로 변경된 경우에도 건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보법 시행규칙에서 위임한 '공단이 정하는 사람'에 '장기체류자로 일정기간 건보 자격을 유지하였던 사람'이 포함되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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