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히 이유 없는’ 난민 신청자 본국 송환

 앙골라 정부의 탄압으로 한국에 왔으며, 한국 행정 당국의 2시간 면접으로 공항에서 287일을 살았다. 지금도 40여 난민이 공항에 살고 있다.
원본보기
©시사IN 신선영‘콩고 출신 앙골라 사람’인 루렌도 씨 가족은 공항에서 287일을 지낸 끝에 입국해 난민심사를 받았다.


이상현 변호사는 공익 법률 활동을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두루’에서 일한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해 287일간 인천공항에서 생활해야 했던 난민 루렌도 은쿠카 가족의 소송을 대리해 승소를 이끌었다. 이 변호사가 소속된 두루는 지난 5월부터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공항 난민 인권개선을 위한 모니터링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일요일이었다(2018년 12월). 나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유엔 난민기구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까지 그랬다. 한 난민 가족이 인천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고, 곧 송환될 것이라고 했다. 난민 가족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목숨을 잃게 될 위험성이 높았다. 변호사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상황의 급박함을 알리고 있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사무실에서 팩스로 접견 신청서를 보내고 홀로 공항에 갔다. 통역을 구할 시간도 없었다. “주말에 막무가내로 접견을 오면 어떡해요?” 출입국 공무원은 짜증 섞인 말투였다. 주말에 접견을 온 전례가 없었나 보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언제든 송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사례도 있었다.

순순히 돌아가면, 그날 밤 난민 가족을 송환시켜버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우기기로 결심했다. “공항 난민의 변호인 접견권은 헌법재판소도 인정한 권리인데, 당장 송환될 것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접견을 거부하는 게 말이 됩니까?”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악성 민원인’이라도 될 각오였다. “오늘 밤에 송환시키지 않을 것이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세요.”

다음 날 다시 찾아간 공항에서 그 난민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접견을 하기 위해서는 임시 출입증을 받아야 했다. 난민 가족이 있는 공항터미널은 보안검색대 너머에 있었다. 탑승객이나 관계자가 아닌 이상 터미널에 들어가기 위한 별도의 허락이 필요했다. 관계자들만 다니는 통로로 터미널에 들어가서 화려한 면세점 사이를 쭉 걸어가니, 중년의 부부와 네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부는 ‘콩고 출신 앙골라 사람’이라고 했다. 콩고 내전 때문에 앙골라에는 콩고 출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은 앙골라에서 심한 탄압을 받는데, 당시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앙골라 정부가 엄청난 수의 콩고 출신자들을 추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콩고 출신자들에 대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시사IN〉 제600호 ‘저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하라’ 기사 참조).

루렌도 은쿠카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렌도 씨가 내게 상처를 내보였다. 경찰차와 접촉사고를 냈다는 이유로 불법 구금되고, 고문을 당했다. 루렌도 씨가 구금 시설에서 탈출하자 경찰은 그의 아내 바체트 보베트 씨를 폭행했다. 루렌도 씨와 보베트 씨의 아이들도 콩고 출신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심한 차별을 당했다. 결국 루렌도 가족은 앙골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들은 한국을 도피처로 택했다. 전 재산을 처분해서 인천행 티켓을 샀다.

하지만 루렌도 가족은 인천공항에서 입국을 거부당했다. 난민 신청도 했지만, 행정 당국은 2~3시간 면접 끝에 이들 가족이 난민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나는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 앙골라의 정세를 알아보았다. 유엔과 해외 언론은 앙골라에서 자행되는 콩고 출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보고하고 있었다. 최근 1년 사이 추방당한 콩고 출신자들이 40만명에 달했다. 이들은 사소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때때로 처형되기도 했다. 폭행을 당하거나, 재산을 빼앗기는 일은 더욱 빈번했다. 앙골라에서 콩고 출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국가폭력이 자행되고 있음은 명백했다. 나는 루렌도 가족의 사건을 맡기로 결심하고, 뜻을 같이한 변호사들과 대리인단을 꾸렸다.

루렌도 가족의 노숙 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 대리인단은 재판을 서둘러 준비했다. 그런데 재판 준비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루렌도 가족이 공항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루렌도 가족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재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루렌도 가족에게 최소한의 생존 환경을 보장하는 일이 시급했다. 끼니는 재판 날짜보다 먼저, 그리고 자주 돌아왔다.

나는 구호단체와 아동단체에 지원이 가능한지 문의해보았다. 다행히도 여러 단체에서 지원해주었다. 언론을 통해 루렌도 가족의 상황이 알려지자, 이들을 돕고 싶다는 연락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주변 사람들과 조금씩 모은 돈을 전달해주고 싶다고 했고, 누군가는 공항에서 과일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들었다며 출국하는 길에 직접 사과와 바나나를 전해주겠다고 했다. 칫솔을 구하기 어렵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사람들이 세면도구를 선물한 덕에 루렌도 가족은 ‘칫솔 부자’가 되기도 했다.

난민 인권단체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난민 인권단체는 SNS를 통해서 루렌도 가족에게 필요한 물품이 무엇인지 공유했고, 출국 차 공항을 방문하는 사람들 편에 물품이 전달될 수 있도록 했다. 루렌도 가족에게 안정적으로 생계비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도 시작됐다.

원본보기
©시사IN 신선영2019년 3월21일 1심 재판 중인 루렌도 가족이 인천지법에서 나오고 있다.

본국 송환 근거는 ‘카더라’ 증거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재판에서 이겨야 했다. 그것이 루렌도 가족의 공항 생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난민법은 공항에서 난민 신청을 받으면 간이심사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간이심사 후에는 입국을 시켜서 정식 난민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명백히 이유 없는 난민 신청’이라고 확인된 경우에만 정식 난민심사 없이 난민 신청자를 송환시킬 수 있다. 본국으로 송환된 난민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러한 법리를 난민법과 난민협약은 ‘강제송환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행정 당국은 루렌도 가족의 난민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난민 신청’이라고 보았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명백히 이유 없는 것인지’ 여부였다. 사실 정식 난민심사에 회부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까지 행정 당국이 조사한 내용은 별것 없었다. 소송이 제기되자 행정 당국은 그제야 ‘명백히 이유 없는 난민 신청’이라고 볼 근거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주 앙골라 한국 대사관을 통해서 루렌도 가족의 행적을 조사했다. 원하는 답변이 오지 않자 행정 당국은 대사관에 반복해서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행정 당국의 노력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대사관 직원은 루렌도 씨의 이웃 주민이 그로부터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국으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루렌도 씨의 말에 대해, 이웃 주민이 전한 말을, 대사관 직원이 다시 행정 당국에 말해주었다는 ‘전문(傳聞)’의 ‘전문’의 ‘전문’이었다. 이른바 ‘카더라’ 증거였다. 루렌도 씨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진위를 법정에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대사관 직원이나 이웃 주민을 법정으로 부를 수도, 재판부가 앙골라에 가서 그들을 만나볼 수도 없었다.

공문 한 장만 보내면 현지 사정을 조사할 수 있었던 행정 당국과 달리, 대리인단은 현지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대리인단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앙골라의 국가 정황을 조사했고 루렌도 가족이 겪었던 박해의 증거를 모았다. 앙골라에서 자행되는 박해에 관한 국제기구의 보고서, 고문의 상처가 남아 있는 루렌도 씨의 다리 사진, 박해의 후유증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는 진단서 등을 모았다.

석 달간 재판을 거쳐 1심 법원은 판결을 선고했다. 법원은 루렌도 가족에게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웃 주민의 전언이 주된 이유였다. 1심 패소 이후, 나는 루렌도 가족에게 재판을 계속할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이 고된 공항 생활을 더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됐다. 가족들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차피 앙골라로 돌아가면 죽는다며, 죽더라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다가 죽겠다고 했다. 가족들은 오히려 낙담해 있는 대리인단을 위로했다.

앙골라로 직접 갈 수는 없지만,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현지 사정을 알아보자고 했다. 대리인단은 루렌도 가족의 이웃 주민, 도피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 본국의 교회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현지 교민과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단체에도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앙골라의 통신 사정이 열악한 탓인지 전화가 끊기거나 문자메시지를 통한 연락이 한동안 두절되는 일이 잦았다. 무엇보다도 언어 장벽이 높았다.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국제전화비가 수십만원 나왔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문제의 ‘이웃 주민’과도 연락이 닿았다. 그는 루렌도 씨로부터 ‘경제적 목적의 이민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그런 말을 들었다고 대사관 직원에게 말한 적도 없다고 했다. 대사관 직원과는 다른 얘기만을 나누었는데, 왜 그렇게 전달된 것인지 의아하다고 했다. 이웃 주민의 말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신빙성이 높아 보였다. 적어도 그의 말을 전한 대사관의 ‘몇 줄짜리 회신’보다는 훨씬 믿을 만했다.

외부인은 알 수 없는 ‘공항 난민’ 인권 현황



루렌도 가족이 한국에 온 지, 즉 공항에서 생활한 지 아홉 달 정도 지났을 때(지난해 10월11일) 2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장은 주문을 선고하기에 앞서 판결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가슴이 뛰었다. 유리한 한마디, 불리한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제1심 판결을 취소한다. 원고들에 대한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을 취소한다.’ 루렌도 가족은 2심에서 승소했고, 한국으로 ‘입국’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한 지 287일 만의 일이다(〈시사IN〉 제632호 “아홉 살 꼬마가 외쳤다 ‘우리는 이제 자유야!’” 기사 참조).

루렌도 가족이 입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항 바라지’를 함께했던 활동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루렌도 가족 아이들과 놀이터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있는 한국 아이들과 노는 데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루렌도 가족 아이들이 집에 돌아가려 하자, 한국 아이들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얘네들 내일도 와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데에 언어는 장벽이 되지 않았고, ‘인권’이라는 거창한 개념도 필요 없었다.

통화 후 나는 루렌도 가족의 첫째 아이 레마(10)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공항에 있을 때 그는 나중에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변호사들을 자주 만난 영향인 듯싶어서, 한편으로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입국 직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꿈이 대통령이라고 했다. 그가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서 보다 큰 꿈을 꾸게 된 것이 기뻤다.

활동가가 보내준 사진 속에서 대통령이 꿈인 앙골라 아이는 다른 한국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루렌도 가족은 상고심에서 최종 승소했고, 이들 가족에 대한 정식 난민심사도 시작되었다. 루렌도 가족은 경기도 모처에 집을 얻어 살고 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의 공항에는 지금도 또 다른 ‘루렌도 가족’들이 살고 있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반복될 일이다. 대한변호사협회의 2019년도 조사에 따르면, 지금도 40명이 넘는 사람이 공항터미널에서 지내고 있다.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공항 특성상 ‘공항 난민’의 인권 현황은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공항의 송환대기실과 출국 구역의 인권 현황에 대해서도 정기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공항 난민’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시급하다.

사단법인 두루는 지난 5월부터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공항 난민 인권개선을 위한 모니터링 사업’을 하고 있다. 공항 난민의 인권 실태를 파악하고, 문제점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사업이 향후 또 다른 루렌도 가족을 만들지 않는 인권 보장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상현 (사단법인 ‘두루’ 공익변호사) editor@sisain.co.kr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