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방송국http://migrantsinkorea.net/험난한 길 끝에는 이주노동자들의 희망찬 미래  

이주노동자 방송국이 개국 1년을 맞은 지난 5월 18일 오전,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 1박2일로 외출을 나온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이 이주노동자 방송국을 방문했다.
작년 서울 출입국 직원들에 의해 새벽에 지하철역에서 강제 연행되던 5월 14일. 본래 그날 오후에는 이주노동자 방송국과의 약속이 잡혀있던 날이었다. 앞으로 이주노조와 이주노동자 방송국이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같이 할 수 있는지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아노아르 위원장은 청주 외국인 보호소로 보내졌고, 이주노동자 방송국은 아노아르 위원장을 다시 만나기 위해 1년을 기다려야했다.
이주노조 까지만 사무국장, 난타 대외협력차장, 다큐인의 문성준씨가 함께 방문했으며, 아노아르 위원장은 이주노조의 전신인 이주지부가 활발히 활동하던 성수분회 시절의 이야기, 앞으로의 계획, 이주노동자 방송국과의 협력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 했고, 참석자들도 각자 이주지부와 인연을 맺은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 개국 1주년인 5월 18일 오전, 병원 치료중인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이 이주노동자 방송국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역 조직과 활동이 활발했던 이주지부 성수분회 시절

아노아르: 2002년 성수조직 때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마석의 비두, 꼬빌이 출입국에 잡혀갔다가 나오게 된 후 이주지부가 힘을 얻게 되었어요.

그때는 일요일 마다 100여 명의 성수 조합원들이 과천 법무부 앞에서 집회를 했어요. 위험이 있는 것은 알지만, 조합원들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참석했지요. 메이데이 때 집회를 성수에서 했어요. 그리고 한 번은 2000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참석하는 큰 집회를 만들기도 했어요.

전민성(이하 '전'): 일본 가나가와 시티 유니온도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있는데, 조합원이 되면, 한 달에 몇 번씩은 현장 투쟁에 참석하는 것이 의무로 되어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동 분쟁을 해결하면, 해결금의 일정 정도를 조합에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해요.

아노아르: 이주노조도 만들 때 그런 제안이 있기도 했지만, 돈 보다는 해결 이후에 조합원으로 남아 계속 활동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수분회의 경험으로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 성수분회의 쇼학동지도 사장과 문제가 있어, 쇼학동지의 회사 앞에서 집회하고, 문제를 해결했지요. (쇼학씨은 현재 이주노조에서 임원을 맡고 있다.) 샤다르, 코큰, 말렉, 졸라 등 많은 동지들이 분회를 통해 노동분쟁을 해결했지만, 해결금 보다는 조합원으로 남아 오랫동안 활발히 활동한 동지들이지요.

그때 당시에 한 번은 한 회사의 다섯 명 분회 조합원들의 체불임금을 해결해 한 사람당 300만원 씩 모두 1500만원을 해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성수분회는 옥탑방이던 신발노조(제화노조)의 사무실에서 매일 모여, 함께 투쟁가, 마임 등을 배웠어요. 송수진씨가 열심히 활동했어요. 하루에 50-80명 까지 모였어요. 당시 조합원이 162명이었지요.

한 번은 신발노조 옥탑방이 있던 건물 2층에 필리핀 가게가 있었는데, 출입국에서 단속을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날 분명히 또 올 것이다’라고 생각해, 우리는 5층에 있던 옥탑방에서 모여 기다렸지요. 예상대로 4-5명의 출입국직원이 3명의 이주노동자를 이미 단속해 봉고차에 싣고, 또 단속을 나오더라구요. 그때 마야가 한양대, 고대 학생들에게 급히 전화해서 학생들과 조합원들을 순식간에 불러 모았어요. 봉고차에 있던 이주노동자들은 도망을 가고, 출입국 직원들도 필리핀 가게에서 단속당한 이주노동자들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지요.

성수분회는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한동안 이주지부에 대해 지켜보다가, 2002년 6월에 단체로 한꺼번에 30명이 조합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예를 들면, 2002년 4월, 5명의 이주지부 조합원이 77일 동안 명동성당에서 노동권보장 농성을 할 때도 농성장을 방문하면서 계속해서 연대를 했습니다.

그때는 성당 안쪽에 기도하는 곳 있지요? 그 앞에 지금 있는 건물이 없고 더 넓었어요. 거기에 발전노조 사람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고, 그 옆에 이주지부 활동가들이 농성을 했지요.

각국어로 조직한 12개국의 이주노동자들

전: 당시 까지만 사무국장은 어느 지역에 계셨습니까?
까지만: 수원이었어요. 이주지부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당시 네팔 이주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이주지부와 함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노아르: 당시, 버즈라, 샤말타파, 조나단, 우다야, 세컨 등 10여 명의 네팔 활동가들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당시 제일 많은 것은 필리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방글라데시, 셋째로 네팔, 그 다음이 인도네시아, 베트남, 파키스탄 순이었어요. 약 12개 국가의 이주노동자들이 모였지요. 당시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양하게 활동했고, 우선 한국말로 된 유인물과 깃발을 만들고, 다시 각 나라 말로 번역을 해서 조직이 활발히 이루어 졌습니다.

전: 당시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노아르: 그건, 카사마코 라는 필리핀 공동체 연합 자체가 조직이 약해진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크 동지는 이주지부 초창기 때부터 국제연대국장을 했었고, 2003년 명동성당 농성 때도 3명의 필리핀 동지들이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건강상 이유로 농성장을 떠난 후 단속이 되었지만요.

까지만: 2003년 7월 30일 고용허가제가 국회에서 통과 되었지요. 처음 고용허가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이주지부는 반대 투쟁을 해왔습니다. (1년 후인) 2002년 정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기비자를 주기도 했어요. 그때 이주지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게 이 비자 신청을 거부할 것을 홍보했지만, 결국 68%가 단기비자를 받고 1년 후 고용허가제는 국회를 통과하게 되지요. 당시 이주지부의 단기비자 반대 투쟁이 성공했더라면, 고용허가제가 국회를 통과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전: 당시는 당시의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요? 여러 나라가 집회에 함께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각국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조직 면에서 참가자들의 수는 많았더라도, 지금처럼 더 주체적인 참가가 가능할 만큼의 상황이 되지 못했을 것 같은데요.

아노아르: 당시는 인천, 의정부, 수원에서 지역집회를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졌는데, 유인물의 내용을 버즈라가 네팔어로 열심히 번역을 했어요.

까지만: 당시에는 NCC가 외노협과 함께 노동허가제 토론을 많이 했지요. 97년부터 외노협은 ‘노동허가제’ 이야기를 꺼냈지만, 이후 다른 입장을 가진 이윤주씨가 떨어져 나오고, 다음으로 2003년에 이주노동자 인권연대가 분리되 나왔습니다.

2002년 4월부터 이주지부와 인연 맺어

아노아르: 당시 소냐는 마석, 마야는 안양, 슈미는 서울, 송수진은 성수 등으로 나누어 지역조직을 했지요. 2002년 고용허가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우리는 큰 투쟁해야 한다’라고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1st 라인, 2nd 라인을 짜서 준비했어요. 그리고 2003년에 고용허가제 반대투쟁 농성을 시작한 것이지요.

전: 2003년 명동성당 농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된 농성이었군요.

난타: SF는 2001년 여름 투쟁본부가 꾸려질 때부터 참가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마석 조직때 이주노동자 활동, 줄여서 ‘이활’이라고 하는 데, 이활에 참가한 학생들이 이후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활동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아노아르: 지금 수원여성의 전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메달씨도 당시 SF의 활동가이지요. 그때는 이주지부 사무실이 마석에 있을 만큼 마석조직이 활발했어요.

문성준: 저는 2002년 4월 명동성당 농성에서부터 이주지부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당시 제가 전주 국제영화제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이주노동자들이 명동에서 농성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큐인 차원에서 저를 보낸 것이었지요. 이후 2002년 4월 명동성당 농성장 텐트 철거 때, 마석 등 에서 촬영을 했지요.

당시 명동성당에서는 발전노조의 파업이 마무리 되어가는 시점이었는데, 그 옆에 이주지부가 텐트를 치려고 하자 명동성당 측에서 못하게 철거를 했지요.

아노아르: 그래서 결국 발전노조가 사용하던 2개의 텐트 중 하나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전: 처음 만든, ‘Stop Crackdown'이란 작품을 보면, 동대문 훈련원에서 가진 대규모 대중 집회의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는데요?

문성준: 그때는 제가 없었고, 참세상의 자료를 제가 도움 받은 것입니다.

아노아르: 그때가 4월 17일 일 거예요. 성수에 사는 제 친한 친구가 그 집회에 참가를 하고 돌아와 제게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 계기로 저도 이주지부에 대해 알게 된 것이지요. 제 친구는 집회 참가 후 얼마 있다가 성수에서 송수진씨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고, 말을 걸었데요. “제가 집회에 참가했었는데, 그때 당신이 사회를 맡은 것을 보았다.” 그렇게 만나 분회활동을 시작했고, 저도 송수진씨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고용허가제가 실시되고 나서, 100여 명의 성수분회 조합원들 중 50여 명이 단속되거나, 자진출국을 했고, 20여 명이 남아있습니다.

전: 6월 4일 이주노조 총회가 잡혀있고, 여기서 새 임원 선출이 예정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노아르 위원장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아노아르: 저는 아직 몸이 많이 좋지 않아, 정신과의 치료가 어느 정도 끝나면, 다시 종합검진을 받고,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들, 지역 조직이라던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일 등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해 나갈 예정입니다.

전: 전에 이주노동자 방송국일에도 관심을 표시한 적이 있는데요?
아노아르: 몸의 건상상태를 보면서 할 수는 부분은 꼭 하고 싶습니다.

덤벌: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픈 중에도 방송국을 찾아 주시고,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노아르 위원장이 일년을 보낸 청주 외국인 보호소는 박정희 시절에는 전(前) 김대중 대통령이, 노태우 시절에는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씨가 수인생활을 하던 곳이다. 오랜 감옥 생활 후 출소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감옥생활의 후유증으로 넓은 장소에 익숙하지 못해 한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아직 지친 몸으로 이제 막 일 년의 보호소 생활을 마친 이주노조 아노아르 위원장은 이 땅의 민주인사들이 걸어간 그 길에 서 있다. 부실한 식사와 열악한 조건에서 매일 매일 이 땅의 42만 이주노동자들의 고통과 희망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 아노아르 위원장. 그 험난한 길 어딘가에는 힘차고 밝은 이주노동자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5월 광주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5월 18일을 개국 날로 정했던 이주노동자 방송국은 개국 1주년을 맞은 2006년 5월 18일, 설립취지에 꼭 맞는 분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광주의 정신’과 ‘해방의 경험’은 5월 18일 하루가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실천되어야 하며, 먼 미래나 지난 과거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보았다.

전민성 minsungc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