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박해 시달린 난민 청소년들, 구조선에서 웃음 되찾아

아쿠아리우스호, 청소년들 위해 농구대회 열고 헌신적으로 보살펴
살해협박·기아·박해 시달리다 자유찾아 나선 난민들…청소년이 절반
"유럽정치인들, 선원의 구조의무 포기 강요…사지에 몰린 난민 외면 안돼"

지중해 리비아 근해에서 난민들 구조하는 구호단체 활동가들 [EPA·SOS 메디테라네=연합뉴스]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유럽연합 국가들이 난민구조선 아쿠아리우스호의 입항과 난민수용 문제를 놓고 합의에 이르기 하루 전인 지난 13일(현지시간), 이 배의 갑판 위에서는 작은 농구대회가 열렸다.

가난과 박해, 전쟁과 폭력을 피해 지중해를 건너다가 구조된 난민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조금이라도 불안감을 덜고 용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구호단체 활동가들이 준비한 대회였다.

청소년들은 실로 오랜만에 얼굴에서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내고 10대의 천진한 얼굴로 돌아가 마음껏 뛰어놀았다.

실컷 땀을 흘린 뒤에는 아쿠아리우스호가 새로 설치한 샤워실에서 묵은 때와 함께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 잡은 깊은 절망감도 씻어냈다.

아쿠아리우스호는 지난 6월 17일 스페인 발렌시아 항에 629명의 난민을 내려놓은 뒤 프랑스 마르세유항으로 이동해 선내 샤워실과 식당, 숙소 등을 정비했다. 난민들을 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보살피기 위해서다.

아쿠아리우스호에 승선해 있는 국경없는의사회(MSF)의 활동가 알로이 비마르는 14일 프랑스 공영 AFP통신과 전화 인터뷰에서 난민 청소년들이 "여린 친구들"이라면서도 "엄청난 고난을 겪어서인지 매우 성숙하고 놀라운 수준의 인내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아쿠아리우스호를 공동으로 운용하는 국제구호단체 'SOS 메디테라네'와 MSF에 따르면, 지난 10일 리비아 근해에서 두 차례에 걸쳐 구조된 141명의 난민 중 절반이 넘는 73명이 미성년자이고, 4분의 1가량은 13∼15세다.

미성년자의 대부분인 67명은 부모도 없이 혼자서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했다.

소말리아 출신의 한 13세 소년은 코앞에서 부모가 범죄집단에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뒤 공포와 분노에 몸서리치다가 결국 목숨을 걸고 유럽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지중해에 닿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대륙 동쪽 끝에 있는 소말리아에서 북부 국가 리비아까지 가야 했는데 이 길 역시 멀고 험했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착한 리비아도 소말리아처럼 무법천지이긴 마찬가지.

무장세력에 붙잡힌 이 소년은 전기충격기로 고문까지 당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뒤 보초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 끝에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난민구조선 아쿠아리우스호에서 난민 어린이들과 놀아주는 구호단체 관계자 [로이터=연합뉴스]

이번에 아쿠아리우스호에 구조된 난민 청소년 중에는 비슷한 사연을 가진 소말리아와 에리트레아 출신이 대부분이다.

소말리아는 지독한 가난에 더해 무장세력 간의 오랜 내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 범죄집단의 기승으로 폭력이 난무하면서 희망이 고갈되고 있다.

독재와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에리트레아는 30만∼40만 명이 수용소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노예처럼 산다.

복무기한이 따로 없는 에리트레아의 징병제에 대해 유엔은 현대판 노예제에 비유하며 철폐를 여러 차례 촉구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은 비참한 환경에서 기약 없이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넌다.

아쿠아리우스호에 승선한 구호단체 활동가들은 이처럼 사지(死地)를 피해 지중해를 건너다 다시 목숨을 잃을 지경에 몰린 난민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아쿠아리우스호처럼 구호단체가 운영하는 난민선이 아닌 일반 선박의 경우에는 바다에 빠져 구조를 기다리는 난민을 외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난민을 구조해봤자 유럽 국가에서 입항이 거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일 리비아 근해에서 아쿠아리우스호가 난민 141명을 구조하기 직전에 5척의 선박이 나무보트와 뗏목이 뒤집혀 간신히 매달려 있는 이들을 발견하자마자 항로를 변경해 피해 갔다고 한다.

활동가 비마르는 유럽의 정치인들이 선박들이 사지에 내몰린 난민을 외면하도록 강요한다면서 "해난 상황에서 선원의 구조의무를 저버리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UNHCR) 대표도 15일 성명을 내고 "구조선들이 지중해에서 표류하는 동안, 유럽 국가들이 최소한의 책임만 지려고 앞다퉈 경쟁하는 상황은 잘못되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했다.

아쿠아리우스호의 난민 141명은 조만간 몰타에 입항해 프랑스·독일·스페인 등 유럽 5개국으로 분산 수용된다.

이들이 유럽 땅을 밟더라도 모두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나긴 난민신청 절차와 검증 작업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난민신청이 거부되면 이들은 추방되거나, 달아나 불법체류자로 숨어 지내야 한다.

사지(死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시뿐, 유럽에서 이방인들에게 보내는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과제가 이들 앞에 놓여있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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