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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혼자 울게 하지 않을 거야

등록 :2020-01-11 13:35수정 :2020-01-1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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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란주의 할 말 많은 눈동자
①중도 입국 청년 찬우씨

돌쟁이 아들 보며 옛 기억 떠올려
엄마 따라온 한국, 낯설고 힘들어
가난과 방황의 힘든 청소년기

미얀마 난민 고난 들으며 성장
타이어 통번역하며 자부심 커져

내가 지은 이름으로 개명했지만
지금은 다시 좋아진 이름 ‘반야’
아내·아이와 행복을 꿈꾸기까지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일러스트레이션 순심

우리 사회에 ‘이주 역사’가 조금씩 쌓여가면서 어릴 적 외국에서 옮겨와 청년기에 접어든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중 한 청년의 이야기다. 찬우(가명)씨는 갓 돌 지난 아이를 둔 24살 아빠다. 가난과 외로움을 벗하며 자랐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말’은 담담하고 푸르다.

타이에서 온 찬우씨 이야기

오늘 지호(가명) 돌잔치를 했다. 방글거리는 지호 사진을 보고 있는데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자다 깨어난 어린 내가 어둠 속에서 운다. 엄마 잠자리가 텅 비었다. 할머니가 말없이 내 작은 등을 쓸어내린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애써 현실로 돌아왔다. 내 품에서 버둥대는 지호가 느껴졌다. 마이크를 잡는 걸 보니 지호는 커서 연예인이 되려나 보다.

네살 때, 엄마 결혼식장에서 한국 아빠를 처음 만났다. 아빠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란 나는 아빠가 어떤 느낌인지 몰랐다. 결혼하고 한국에 갔던 엄마가 한번씩 타이 집에 오면, 내가 울고 매달릴까 봐 꼭 잘 때 떠나곤 했다. 엄마도 울면서 갔다고 나중에 할머니에게 들었다. 엄마가 돈을 보내왔지만 우리 가족은 늘 돈이 없었다. 가난한 쟤랑은 놀지 마, 그런 말도 들었다. 부모가 미리 맡겨놓은 돈으로 매일 10밧(약 380원)어치씩 간식을 주고 기록하는 학교 장부에는 내 이름에만 빨간색 숫자가 쓰여 있었다. 너는 마이너스인데 왜 자꾸 간식을 먹느냐고 선생님도 타박을 했다. 내 간식 빚을 줄여보려고 다른 친구 이름에 몰래 써놓던 날은 조그만 가슴이 벌렁거렸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한국으로 데려갈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엄마는 달래곤 했다. 나는 겁도 없이 피시방에 들락거리고 밤거리를 배회했다. 그 소식에 놀란 엄마는, 마약 패거리한테 걸리면 끝장이라며 당장 한국으로 가자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인사도 못 하고 한국으로 왔다. 나중에 페이스북으로 찾아낸 어릴 적 친구들은 내가 실종된 줄 알았다고 꽥꽥거렸다.

한국에 와서도 사는 건 쉽지 않았다. 단칸방에 엄마와 어린 동생, 아빠가 같이 살았다. 아빠 사업이 망해서 힘들다고 했다. 어디라도 같이 갈 때면 엄마는 빨리 걸으라고 나를 재촉했다.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느려서는 안 된다!” 엄마는 고작 열세살짜리에게 그런 말을 했다. 김치 먹는 일은 또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맵고 신 김치에 나는 진저리가 났다. 김치를 먹어야 한국인이 된다는 말에 왈칵 겁이 났다. 나중에 학교 급식으로 나온 이파리 많은 안 매운 김치 덕분에 나는 간신히 한국인이 되었다. 나는 한국어를 몰라 곧바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이주민센터에서 노동자 형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한 대학생 선생님이 있었는데, 내가 숙제도 안 하고 까불까불 도망 다니니까 아예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같이 걷고 놀며, 저게 뭐지? 고양이! 고양이가 무슨 색깔이지? 이런 길거리 수업으로 나는 한국어에 조금씩 마음을 붙여갔다.

그 뒤로는 공부방에 다니며 말을 더 배우고 중학교에 갔다. 교장선생님이 잘하든 못하든 해보라며 준 국어와 수학 시험지는 별로 안 어려웠다. 75점을 맞아 입학을 허락받았다. 내 이름표에 쓰인 ‘반야’라는 낯선 이름을 보고 아이들이 신기해했다. 나는 처음부터 사실대로 얘기했다. 나는 타이에서 왔어, 한국말 할 수 있어. 학교 친구들과 피시방에도 같이 다니며 잘 지냈지만, 딱히 ‘친구’라 할 만한 친구는 없었다. 속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었다. 친구들이 생일을 맞으면 같이 모여 노는데, 나는 한번도 초대받지 못했다. 섭섭하고 우울했다. 학교만 끝나면 혼자였다. 공부방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피시방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그 때문에 엄마와 주변 사람들은 실망하고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헤어나지 못했다. 나는 방황했다.

춥고 배고픈 밤의 끝에

아빠는 매일 술을 드셨다. 술상과 어린 나를 앞에 두고 넋두리를 하고 또 했다. 한번은 그런 아빠에게 대들다 스탠드 옷걸이가 부러질 만큼 맞기도 했다. 엄마는 나를 감싸려고 울면서 싸웠다. 그날 엄마랑 나는 신발도 못 신고 뛰쳐나와 둘이 끌어안고 차에서 잤다. 우리 가족 상황은 아주 바닥이었다. 아빠도 방황했다. 사춘기였던 나처럼.

엄마는 쉼 없이 일했지만 돈은 항상 없었다. 엄마가 먼 식당으로 일하러 가면서 동생을 데리고 갔다. 나는 아빠와 지하방을 얻어 지냈다. 아빠는 주로 회사 기숙사에서 자면서 가끔 와서 밥 먹으라고 1만~2만원씩 주고 갔다. 나는 버스비도 없었다. 하루는 집에 들어갔더니 문에 전기를 끊겠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보일러는 작동되지 않았다. 가스도 끊겼나 싶었다.

곧이어 집주인이 내려와서 문을 두드렸다. 방에 불이 켜지길 기다린 것 같았다.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 월세 언제 낼 거야!” 나는 무서워서 얼른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귀를 틀어막았다. 이불 속에 퀴퀴한 냉기가 가득했다. 집주인이 신발을 끌며 다시 올라가는 소리를 듣고 나는 가스버너를 켰다. 푸르게 작은 불이 올라오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손이 오그라들었다. 배 속 깊은 데서 울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춥고 어둡고 배고픈 밤이었다.

나는 엄마를 도우려고 열심히 알바를 했다. 중학생은 안 받아준대서 고등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적은 돈이라도 엄마에게 드릴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죄를 지으면 죽을 때 다 지고 가서 몇만배로 갚아야 한다고, 수많은 죄 중에 가장 나쁜 죄는 부모를 울게 하는 죄라고, 나는 엄마 눈에서 눈물 안 나게 하려고 간절히 애를 썼다.

엄마는 내게 고등학교에 안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일찍 돈을 벌면 좋겠다고.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하다 가야겠다고 하니 엄마는 돈 걱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양 절차를 밟고 있던 나는 아직 외국인 신분이어서 무얼 지원받기가 힘들었다. 그토록 어렵게 간 고등학교였지만 성적은 별로였다. 국어시간에 사자성어가 나오면 그냥 ‘멘붕’이 왔다. 한국 애들 중에 나보다 성적이 못한 애들이 있었는데, 그건 좀 신기한 일이었다.

한번은 행사에서 만났던 한국 애들과 좀 깊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엄마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한국 와서 적응하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하니 아이들이 놀라워하며 걱정을 해줬다. 나 혼자 생각에 한국 애들은 배고픈 일 없이 만사 편하게만 지내는 줄 알았는데, 애들은 성적이나 대학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다. 오히려 내가 피시방에 맘대로 가는 것을 부러워했다.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위로했다. 낯설지만 따뜻한 경험이었다.

또 청소년 국제교류 행사 참여자로 뽑혀 타이에 있는 미얀마 난민캠프를 방문한 적도 있다. 내가 타이어를 하는 덕분에 얻은 행운이었다. 그때 처음 내 나라 타이가 마냥 좋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미얀마인들이 타이로 밀입국하다 생사가 갈리고, 가족과 생이별하고, 일한 돈도 못 받고 쫓기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 걱정거리는 절로 머쓱해졌다. 이런 경험들은 나를 성숙하게 했다. 작은 고난쯤은 툭 털어낼 수 있게 용기를 주었다.

나에게 힘이 된 타이어 능력

그러면서도 나는 빨리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찬우라는 이름을 미리 지어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입양 절차가 끝나고 드디어 한국 국적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는 혼자 법원으로 달려가 개명 신청을 했다. 어려서 그랬던 걸까, 남들과 다른 것이 그렇게 싫었다. 내 이름이 나쁜 꼬리표인 듯 빨리 떼어버리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다. 지금은 다시 ‘반야’가 좋다.

친구들처럼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성적은 나빴고, 우리 집 사정은 더 나빴다. 엄마는 내가 어서 돈 벌기를 기다렸다. 나는 내 인생이 애처로웠다. 무턱대고 수능을 봤다. 원서도 내봤다. 학교에 붙으니 마음이 더 쪼그라들었다. 어차피 가지도 못할 걸 왜 시험을 봤을까, 왜 원서를 냈을까. 망설임과 한숨 끝에 나는 등록금을 얻으러 다녔다. 엄마도 나를 말리지 못했다. 주변에서 내 사정을 알고 장학금을 연결해주고, 잘했다고 토닥여주기도 했다. 장학금에 학자금대출에 알바로 버텨가며 간신히 관광학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 빨간 글자에 겁내며 절대 빚지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빚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여행사에 취직했다. 타이어를 잘한다는 것이 내게 큰 재산이었다. 타이 손님을 가이드하며 여행사 업무를 익혔다. 관광버스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좋은 관광코스를 소개해주고, 일정 짜는 방법도 알려주며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일하다 막히면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전과는 아주 다르다. 폭언하거나 때리는 일도 없다. 동생과 나를 차별하지도 않는다. 가끔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같이 한잔하자고 하신다. 아버지와 나는 좋은 부자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가이드로 실적을 꽤 올렸지만 회사는 실망스러웠다. 월급이 몇달 안 나오더니, 문 닫을 거라는 소문이 돌고, 곧 사장도 사라져버렸다. 취직만 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역시 인생은 롤러코스터였다.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어 마음을 다잡았다. 새 일자리는 법률사무소 통역 번역 일이었다. 이 일은 내게 자부심을 주었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 이렇게 기쁜 일이라니! 게다가 다른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은 아내 마리(가명)와 지호다. 가정을 이루고 아빠가 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주변에서는 걱정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대학생 때, 한국어 통역을 해주려고 만났다가 사랑하게 된 마리는 참 단단한 사람이다. 두 사람은 나를 지켜주는 힘이고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다. 온 세상을 쓸고 다닐 듯 힘차게 기어 다니는 지호를 위해 나는 또 큰 결심을 했다. 거금을 대출받아 방 두개짜리 집을 얻었다. 이게 바로 아빠 마음이겠지. 나는 지호가 어둠 속에서 혼자 울지 않도록 항상 곁에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

이주 청소년을 위한다면

지난해 11월 법무부는, 귀화자를 포함한 18살 이하 중도 입국 자녀가 1만여명이며, 이들의 진학을 유도하기 위해 취학 여부를 비자 연장 심사에 반영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에 못 다녀 가뜩이나 서러운 아이들에게서 비자까지 빼앗겠다는 말로 들린다. 이주 청소년들이 학교에 못 다니는 이유는 다양하다. 찬우씨처럼 가난 때문인 경우도 많다. 비자로 압박하기 전에 사정을 먼저 살펴 보듬을 방법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이주 청소년의 삶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이해를 기반으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직도 높다란 학교 진입 장벽을 없애고 그 안에서 사랑받으며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학교만이 아니다. 이주 청소년들에게는 생존, 인간관계, 학습과 진학, 사회 진출, 결혼 등 모든 것이 거대한 벽이다. 첩첩 막아선 벽 앞에서 찬우들이 혼자 몸부림치다 좌절하지 않도록 같이 벽을 해체하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부디!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24055.html?fbclid=IwAR3w873OXT-Ftm_JY_RNLpmY1EV7I91wO09EcJU8L7yzVo3-0f-nR-MuiFM#csidx1336629f7629649a22a3d4fc6b0ad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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