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온 사람이 한국에서 죽었다. 자기보다 15살이 많은 한국 남성과 결혼하고 한국에 온 지 3개월 만에 남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생활비와 용돈을 달라는 아내의 요청에 남편은 “너의 생활은 네가 알아서 하라”며 폭언을 했고, 그녀가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자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겨 말다툼을 하다가 살해하고 암매장했다고 한다.

[시선]죽음을 기록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녀가 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을지, 낯선 타국의 삶을 선택한 그녀에게 ‘생활비’와 ‘용돈’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한국말이 서툰 그녀와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남편 사이에 어떤 ‘대화’와 ‘말다툼’이 오고 갔을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떠올려볼 수 있다. 과연 이러한 두 사람의 결합을 우리 헌법 제36조에서 정한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는 혼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이란에서 온 사람이 한국에서 죽었다. 2007년 한국에 입국한 그는 10년 넘게 한국 사람들이 외면해온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자리에서 묵묵히 일했다. 그의 노동으로 우리가 무심코 버렸던 냄새나는 재활용 쓰레기가 분류되었다. 법무부가 허가한 체류기간을 넘어 일하다 단속에 적발된 그는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1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던 중 지난달 복통을 호소해 병원에 옮겨진 뒤 3일 만에 급성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외국인보호소는 한국을 떠나야 하는 외국인을 출국할 때까지 보호하는 공공기관이다. ‘보호소’는 잘못된 법률용어가 사실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인데, 감옥과 다름없는 구금시설인 이곳이 정말 ‘보호’ 시설이라면 최소한 아픈 사람에 대한 제대로 된 진료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무부 발표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1만5000건의 진료가 있었는데, 의료진은 정형외과 전공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이 전부였다. 휴일 없이 매일 일해도 하루에 40건 이상이고, 현실은 더 열악하다. 하루 정해진 몇 시간 동안 수백명의 환자를 의사 혼자서 진료한다. 그러니 제대로 된 진료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망한 노동자도 안과 질환에 대한 안약만 몇 번 처방받았을 뿐, 심부전 같은 내과적 질환은 진료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네팔에서 온 사람이 한국에서 죽었다. 네팔에서 한국에 도착한 지 보름 만에 일하던 공장의 커다란 철제 구조물에 깔렸다. 네팔에서는 마을에서 소문난 성실한 청년이었다. 한국으로 오기 위해서 한국어를 공부해 시험에 합격하고, 구직자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어려운 형편에 가족과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한국에 도착했다. 그리고 첫 월급도 받기 전에 황망히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의 성인 노동자를 만들기 위해 사회는 많은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과 교육에도 모두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는 우리 사회가 10원 하나 투자하지 않은 채 완성된 노동력이다.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이러한 노동력을 사람을 구할 수 없는 가장 열악한 산업에 가둬두고 몇 년마다 한 번씩 새로운 노동력으로 바꿔가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숫자의 내국인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을 고려할 때, 이주노동자들이 가난한 본국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으니 최저임금을 더 낮춰 적게 줘야 한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도둑놈 심보다.

이 모든 일이 불과 몇 달 새 일어났다.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죽음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는 감춰진 죽음도 많을 것이다. 계속되는 죽음의 행렬에 정부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한국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담아 먼 타국에서 세상을 떠난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11242040025&code=990100#csidx96b15b720cadfd89ebec66d854f82c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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