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선 포퓰리즘: 혜화역 시위와 예멘 난민

현재 한국 인터넷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성별 갈등이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주로 자주 들리는 청년층 커뮤니티에서는 이 주제만큼 화끈하게 좌중을 달구는 주제를 아직 본 적이 없다. 몇몇 사이트에서는 성별 갈등에 관한 주제가 너무나 많이 올라오다보니 관련 이슈만을 따로 다루는 게시판을 신설하는 긴급조치를 취하기도 했다(혹은 그 반대로 성별 갈등 이슈를 다루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커뮤니티도 생기고 있다).

내가 주로 들리는 남초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여초 커뮤니티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이 현상 자체를 다루는 컨텐츠들도 점차 늘고 있다. 네이버 블로거이자 만화가인 카광이 그리는 관련 만화를 몇 개 읽어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혜화역 시위: 갈라진 세계  

남녀 갈등 이슈는 지난 6월 9일 혜화역에서 일어난 시위에 거의 정점을 찍었다. 시위 주최 측은 홍대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사건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피해자가 남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먼저 5월 19일에 1차 시위를 열었고, 6월 9일에 2차 시위를 열 것을 예고했다. 2차 시위는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을 불러모으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했다(주최 추산 3만명, 경찰 추산 1만 5천명). 이들은 여성의 몰카 피해 사례에 빠르고 강력하게 대처하기를 촉구하면서 “동일범죄 동일처벌”이라는 구호를 내세웠고, 여경과 남경의 비율을 9:1로 맞춰 채용하고 여성 경찰청장, 검찰총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많은 언론들도 이 시위를 소개하였고, 특히 진보 성향 언론은 굉장히 우호적인 논조를 보여주었다.

한겨레,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박현정 신민정 기자, 2018. 6. 2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49982.html

한겨레, “왜 많은 여성이 모이나?” 혜화역 시위 운영진에게 물었다 (박현정 신민정 기자, 2018. 6. 21.)

남성들이 주로 드나드는 커뮤니티에서는 당연히 이 시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시위대 측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는지 강조했다. 대다수는 시위의 목적과 수단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위대의 구호 중 하나였던 “자이루”는 대표적인 사례다. 주최 측에서는 유명 BJ 보겸이 자주 쓰는 말인 “보이루(보겸+하이루)”가 여성의 성기와 “하이루”를 합성한 여성혐오적 발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미러링으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KBS에서 동일한 논조로 보도한 적도 있다). 당연히 남성 네티즌들은 ‘세상에 그러면 보로 시작하는 모든 말을 다 검열해야겠네?’하면서 역시 온갖 창의적인 드립들로 응수했다.

그 중에서 단연코 가장 큰 화제성을 띤 것은 인기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BJ인 ‘액시스 마이콜(마재)’의 방송이었다. 마재는 ‘언론이 결코 보도하지 않는 남혐 시위의 진실을 내가 보도하겠다’라며 단신으로 시위 현장을 찾아갔다. 시위대 측은 모든 촬영을 거부하면서 행인들의 핸드폰도 검열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영상 중계를 하는 마재에게 불똥이 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마재는 과거 판례를 인용하면서 집회 및 시위를 보도하는 데 있어서는 초상권이 적용되지 않으며, 자신의 얼굴만 방송하고 있는데 문제될 게 무엇이느냐고 반문하였다. 마재는 이후 1시간가량 집회 현장 주변에서 방송을 계속했고, 경찰의 요청으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얼추 수십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이 방송을 보았고 각종 커뮤니티의 여론은 마재를 칭송하면서 페미니즘의 현실에 눈을 감는 언론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관심을 끌어모으고 숱한 논쟁을 불어일으킨 시위였지만, 관련 논의수준은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남성 혹은 여성 측이 대변하는 주장과 여론이 너무 극명하게 갈렸다. 두 집단이 인식하는 세계부터가 너무 달랐다. 그래서 합의점과 중간 지대를 만들기도 어려워보인다. 어느 한 쪽의 주장을 채택할 경우 다른 쪽과는 필연적으로 아주 피곤한 언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더 성숙한 논의로 발전할 기회조차 차단된 것이다.

(혜화역 시위에 관한 서술을 편파적으로 느낄 독자가 계실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남성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워낙 논쟁적인 사안이니만큼 여러 글을 읽어보는 것을 권한다.)

‘예멘 난민’ 사태로 대동단결  

그런데 인터넷 여론은 정말 갑작스럽게 아예 다른 이슈로 넘어갔다. 무비자 체류 제도를 이용하여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500여명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여론도 빠르게 파악될 수 있었다. 제노포비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청원은 청와대 측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상당한 청원자를 모은 상태였다.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외국인 혐오증(外國人嫌惡症) 혹은 외국인 혐오(外國人嫌惡)는 외국인 또는 이민족 집단을 혐오, 배척이나 증오하는 것을 말한다. 제노포비아(Xenophobia)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방인이라는 의미의 ‘제노'(Xeno)와 혐오를 의미하는 ‘포비아'(Phobia)가 합성된 말이다. (출처: 위키백과 – ‘외국인 혐오증’)

현재 난민법, 무사증입국, 난민신청허가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은 현재 시각(2018. 6. 25. 오후 1시) 40만 명 이상이 청원에 동의한 상태다. 여기에는 무슬림 이민자들에 대한 공포가 크게 작용했다. 난민을 받은 유럽이 고충을 겪고 있고, 테러와 범죄에 노출됐으며, 무슬림은 내부적으로 융화되지 않고 샤리아(이슬람교의 율법, 규범 체계)를 계속 고수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상황이 흥미롭게 돌아간 것은 그토록 으르렁대던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한 목소리를 보여주면서였다.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의 ‘단결’은, 개인적으로는, 외집단과 투쟁을 통해서 내집단의 사회적 결속력을 확보한다는 피터 터친의 이론을 떠올리게 할만큼 인상적이었다.

이슬람 모슬렘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이슬람 문화가 얼마나 여성에 적대적인지 강조했다. 아마도 이번 예멘 난민의 다수가 젊은 미혼 남성이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예측한다. 남초 커뮤니티들은 특별히 성별의 관점에서 접근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을 받는 것은 몹시 위험하다는 정서만큼은 아주 확실히 공유했다. 디씨인사이드의 시대 이래로 이런 식으로 커뮤니티 대통합을 보게 될 줄은 나도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참 인터넷 재밌게 돌아간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가려운 면이 분명 있었다. 이 일련의 사건이 여론 지형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까도 말했듯이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마재의 생중계를 공정한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여겨진 글을 아직까지 보진 못했다. 예멘 난민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가자 흐름을 따라잡는 것 자체가 힘들어졌다. 여초와 남초의 대단결쯤 되자 생각지도 못한 이슈들이 연계되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역시 뭔가 잡힐듯 말듯 잡히지 않는 ‘떡밥’을 구성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페이스북 게시글들이나 보던 와중에 갑자기 이 모든 이야기들을 맞출 퍼즐을 찾은 느낌을 받았다. 여성들이 예멘 난민에 대해서 갖는 두려움(혹은 혐오)의 감정이 올바르진 않더라도 아예 터무니 없이 부당한 것은 아니라는 변호의 글이었다. 이런 글 자체는 찾아보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권력관계에 반대하고 소수자와 연대한다는 여성주의가 어떻게 제노포비아에 가담할 수 있느냐는 성토 글도 몇 개씩 따라왔다. 나는 이 논쟁이 여초, 남초, 그리고 난민 사태를 이어주는 하나의 고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포퓰리즘

2018년 세계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그중 2016년은 21세기 포퓰리즘 역사의 전환점이라고 해도 될만한 해였다. 브렉시트의 통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 연달아 일어나며 대서양 양안을 강타한 것이다.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_compressed https://flic.kr/p/9hHrit

Gage Skidmore, “Donald Trump”, CC BY SA

그 전에는 에스파냐의 포데모스(Podemos, 우린 할 수 있다. 2014년 1월 16일에 창당된 스페인의 좌익 정당) , 그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로 대표되는 좌파 포퓰리스트들이 남유럽에서 집권을 하면서 포퓰리즘의 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대안당과 국민전선의 약진, 이탈리아에서 오성운동과 북부동맹의 연정 등으로 포퓰리즘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트렌드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년에 걸쳐 안정적인 정치 경제를 운영해오고, 공산주의의 도전마저 물리친 서구 사회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부의 도전에 마주친 것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많은 분석가가 처음에 경제적인 원인을 지목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세계화와 기술 혁신은 서구 사회의 중산층을 붕괴시킨 것이 포퓰리즘의 원인이었다. 제1세계 중산층은 자유로워진 자본, 노동의 이동과 인력을 대체하는 기술발전의 파고에 가장 크게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이후로 줄곧 멕시코나 아랍계 이주민,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의 노동자, 그리고 로봇에 밀려나기만 했다. 바로 이들의 분노가 트럼프, 샌더스, 브렉시트 등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시각에 공감하며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이라는 충격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서 사람들은 경제적 원인에 모든 것을 귀인시키는 설명이 지나치게 투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불평등의 확대와 안정적 일자리의 축소가 포퓰리즘으로 향하는 분노를 만들어낸 기저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몇몇 사람은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의외로 살만한 사람’일수록 트럼프를 찍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곧이어 경제적 현실과 매개된 수많은 요인이 제시되었다. 인종차별 의식, 미디어 효과, 기성정치 질서에 대한 불만,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염증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이 문제에 답을 제대로 내리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포퓰리즘은 현재 미국이나 유럽 일부 국가에만 국한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 같은 세계적인 현상으로 자리잡은 것 같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남유럽의 좌파 포퓰리즘 이전에는 개도국이 포퓰리즘의 물결과 마주쳤다. 태국의 탁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터키의 에르도안 같은 이들 말이다.

즉,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2000년대 개도국의 불안정한 민주국가에서 시작된 포퓰리즘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남유럽의 주변부 선진국으로 확대했고, 2010년대에는 세계 최고 중심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포퓰리즘이 이처럼 다양한 지역에 퍼지다보니 개별 사회의 맥락이 포퓰리즘 운동에 강하게 개입하고 있어 하나의 단일 요인을 뽑아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터키의 이슬람주의와 미국의 트럼프주의와 에스파냐의 포데모스를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포퓰리즘을 분석하는 데 장점이 되어주기도 한다. 여러 사례를 비교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뽑아내는 것 또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미 몇몇 학자은 현대 포퓰리즘의 물결 속에서 길을 잡는 데 유용할 몇몇 이정표들을 내놓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들은 대체로 다음 요소를 포퓰리즘의 주요 인자로  꼽는다.

  • 경제적 불안
  • 소셜 미디어(SNS)의 확산
  • 정치제도와 시민의 분리
  • 대표성 없는 전문 관료의 막강한 권한
  • 초국적 문제의 부상과 국제협력의 확대
  • 이주민의 물결과 본국의 인구변천 등

개인적인 판단으로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줄 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불안감’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기 전에 우선 계속 말하는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한국어로 제대로 번역이 잘 안 되는 말인 데다가 직관적으로 그 의미가 와닿지 않아 남용되는 경향이 있는 용어기 때문이다.

존 주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는 논쟁적인 이 단어를 그럭저럭 간명하게 정의해준다. 포퓰리즘의 세계관은 국민을 배신하는 ‘타락한 엘리트 집단’과 소외받는 다수의 선량한 진짜 국민”의 이분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우익 포퓰리즘의 경우 엘리트 집단이 비호해주는 ‘소수 기득권 집단’을 추가하여 삼분법이 되기도 한다. 어쟀든 포퓰리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정치제도, 입법부, 정치인, 정당 등이 다수 국민을 대표하지 않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분노다.

포퓰리즘의 세계화

하버드 대학교의 야스차 뭉크 [위험한 민주주의]에서 이 역학을 잘 설명해준다. 뭉크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자유주의와 대의제를 통한 인민의 통치라는 민주주의는 점차 분리되기 시작했다. 엘리트 정치와 대중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런 와중에 대중들 사이에서 합의가 안 된 자유주의적 권리가 대법원, 국제기구 등을 통해서 보장되기 시작했다. 오바마가 의회를 우회하고 연방대법원을 통해 통과시킨 동성혼 합법화 조치 같은 것이 대표적 예시다. 그렇게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 가능하듯이,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권리보장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권리보장 없는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포퓰리스트들은 이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에 대한 분노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동원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 정치제도를 우회하는 운동으로 발전한다. 기존 민주당, 공화당 체제 바깥에서 들이닥친 샌더스와 트럼프가 대표적인 예시다. 많은 유럽 국가들의 포퓰리스트들도 전후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양당 구도 바깥에서 등장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기존 정당 질서, 관료 등을 대신해 “소외당한 진정한 국민”들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집권해야한다고 주장한다.

DonkeyHotey, Bernie Sanders - Portrait, CC BY https://flic.kr/p/vVL7to

샌더스는 이념상으로는 트럼프의 ‘반대말’에 가깝지만, 포퓰리즘이라는 관점에서는 ‘동의어’에 가깝다. (출처:  DonkeyHotey, Bernie Sanders – Portrait, CC BY)

이런 정서는 불안감과 강력한 연관성을 지닌다. 불안감은 자신이 미래의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인식할 때 찾아온다. 타락한 엘리트들이 일반 국민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국가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마음대로 주물럭 댄다는 인식은 무기력감과 불안감을 확산시킨다. 엘리트들의 협잡으로 모든 사안을 결정하고 나는 거기서 어떤 통제력과 발언권도 확보하지 못한다면, 대체 어떤 결과가 나에게 찾아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났을 때 무언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면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불안한 심리와 인식에 집중한다면 왜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이 ‘의외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가난한 것보다는 ‘언젠가 나의 노력과는 상관 없이 내가 가난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떠는 사람들이 트럼프를 찍을 가능성이 높다. 진짜 장기간의 실직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보다, 옆 마을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해 친척들이 실직한 걸 직접 지켜본 사람들이 트럼프를 더 열렬히 지지한다.

같은 이유로 이민자 비율이 낮은 동독 지역에서 왜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ur Deutschland, AfD: 독일의 우익대중주의 정당)이 높은 지지를 받았는지도 설명이 된다. 첫째로 동독 지역은 통일 이후 만성적인 불안감과 박탈감에 시달렸던 지역이다. 둘째로 경제적 차이 때문에 서독인은 난민과 임금을 놓고 경쟁할 일이 별로 없지만 동독인은 그럴 수 있다. 셋째로 이민자 비율이 낮기 때문에 이민자들이 익숙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감도 제일 클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민주주의 새로운 위기, 무엇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소셜미디어와 불안의 확산 

야스차 뭉크는 이런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핵심 요인을 세 가지로 지적한다.

  1. 경제적 불안
  2. 이민에 대한 불안
  3. 소셜미디어

경제적 불안과 이민에 대한 불안은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소셜미디어는 무엇이 문제일까? 과거 미디어는 철저히 중앙집권적이었다. 여기서 주인공들은 전국 단위로 정보를 취합해서 보도하는 TV 방송국들과 전국 신문들이었다. 이들은 데스크를 장악해서 어떤 정보를 보도할지 말지를 통제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중앙 언론이 막강한 인프라로 쳐놓은 진입장벽 때문에 도저히 그 장악력을 뚫고갈 수가 없었다. 이 시스템의 장점은 중앙 언론이 책임감 있게만 행동한다면 어느 정도 정제된 정보들을 받아볼 수 있다는 데 있다. 대신 단점도 확실해서, 중앙 언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정보들은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게 굉장히 힘들었다.

소셜미디어는 이 구도를 바꿨는데, 중앙 데스크의 장악력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사람이 터트린 자료라고 할지라도, 소셜미디어에서 적절한 네트워크를 타기만 하면 전국적으로 금방 확산될 수 있다. 중간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허브를 만나기만 하면 그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이 현상의 장점은 과거 중앙 언론만이 가졌던 막대한 정보 장악력을 해체시켜 어떤 정보든 비교적 자유롭게 유통시킬 수 있게 됐다는 데 있다. 단점의 경우 이전 시스템의 장점을 뒤집으면 된다. 어떤 정보든 정제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가짜뉴스의 범람은 미디어 환경이 이처럼 변화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문제든 가짜뉴스든 진짜뉴스든 중앙 통제를 거치지 않은 미디어를 통해 온갖 자료들과 정보들이 사람들에게 확산된다는 것이다.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키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적절한 미디어 자료를 만들어내기만 하면 된다. 퍼트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해줄 것이다. 러시아는 이 점을 간파하고 봇을 통해서 브렉시트와 트럼프를 지지하는 선전 메시지들을 말 그대로 살포하기도 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포퓰리즘의 승리가 자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의 루머 등은 다루긴 하지만 아주 적게 다룬다.

소셜미디어는 전통 미디어의 ‘중앙 통제권’를 해체했다. 하지만 무책임한 가짜뉴스를 불러오기도 했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대로 인식하기에는 현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팩트”들과 자료들이 너무 많고, 서로가 상반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입맛에 맞게 그것을 취사선택해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던 불안감들과 아주 잘 부합하는 자료들을 확산시키면서 개인의 세계 인식을 조정해준다. 경제적 불안이나 이민자의 범죄통계에 대한 논쟁이 그렇게나 인터넷 상에서 활발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 사회 포퓰리즘의 발흥을 우리는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포퓰리즘은 경제적, 문화적 변화에 직면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이들이 주도한다. 그리고 이들의 불안감은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널리, 빠르게 확산되며, 기성 정치 질서는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감은 다시 극대화된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대중운동이라는 형식으로 제도를 우회해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것이 끝까지 가면 타락한 엘리트를 정화하겠다고 공언하는 강력한 지도자에게 전권을 몰아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데, 터키에서 벌어졌고, 현재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터키판 '개발독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7). 헌법 개정 후 현지 시각 2018년 6월 24일 함께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21세기 술탄'(중세 이슬람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대선에선 에르도안이 52.7% 득표했고, 총선에선 정의개발당 42.68% 득표했다.

터키판 ‘개발독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17). 헌법 개정 후 현지 시각 2018년 6월 24일 함께 치러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21세기 술탄'(중세 이슬람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대선에선 에르도안이 52.7% 득표했고, 총선에선 정의개발당 42.68% 득표했다.

불안과 불신 

그동안 서구 포퓰리즘은 머나먼 나라의 일로만 여겨졌다. 한국이나 일본은 전반적으로 포퓰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은 제조업 기반이 여전히 탄탄했고, 이민자 이슈가 활성화될만큼 이민자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특히 1987년부터 2016년까지 30년 동안 한국의 정치 구도는 권위주의 세력의 후신과 민주화 세력의 후신의 싸움이 알파에서 오메가나 다름 없었다. 그동안 국가의 힘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정부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감정을 주로 지니고 있었다.

한국인의 인식 상 국가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만능해결사였지만, 공무원과 관료 그리고 정치인이 하는 일 중 제대로 돌아가는 일은 또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일상에서 만나는 국가가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국가를 안 믿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수준은 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나도 포퓰리즘에 관해 얘기할 때 언제나 서구 사회에 국한해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예멘 난민 사태를 통해 한국 또한 포퓰리즘의 무풍지대는 아니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무슬림이 범죄와 테러를 저지르고 자신들만의 ‘샤리아존’을 만들어 평범한 한국인과 충돌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문화적 불안을 반영한다. 조선족, 탈북민에 이어 난민마저도 한국인의 임금을 계속 낮추고 있다는 이야기도 종종 봤다. 이것은 경제적 불안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국민들이 당장 불안에 떨든 말든 선량하고 도덕적인 코스프레에나 정신 팔린 진보 정권’ 혹은 ‘애 안 낳으니까 싸게 일 해줄 노예나 수입하는 헬조센’ 등의 반감으로 구체화된다.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정부의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불신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JD Hancock, Big Fear, CC BY https://flic.kr/p/85Mum2

JD Hancock, “Big Fear”, CC BY

아까 야스차 뭉크가 보여준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와 “권리보장 없는 민주주의”의 구도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국제적 합의사항을 이행하고 난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다수 국민이 그것을 반대한다면 어떻게 해야될까? 그럼에도 올바른 일일 수는 있다. 하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적절한 일일까? 정부가 난민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고 국제사회의 기준을 준수하겠다고 발표한 뒤에 난민이 적은 수라도 지속적으로 유입된다면 아마 많은 사람이 불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장 내 옆집에 무시무시한 아랍 테러리스트가 살게될지도 모르는데.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어디에서 무슬림이 저지른 흉악범죄가 일어났다더라. 정부는 제정신인 건가? 니들이 사는 강남에는 난민들이랑 부대끼고 살 일 없다 이거지?’

당장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아닌가?

성취 지위와 귀속 지위

내가 앞에서 여성주의 내부 논쟁에 흥미를 느낀 이유도 여기 있다. 아마 여성주의 내부에서도 고학력 엘리트 성향이 강한 이들은 난민 수용에 대해서도 우호적일 것이다. 반대로 현재 동원력의 핵심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부정적일 가능성이 크다. 소득, 학력과 이민에 대한 선호 사이의 상관관계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공히 관찰되는 경향성이다.

왜 그럴까?

야스차 뭉크는 미래가 불확실해질수록 사람들이 자신들이 직접 획득한 ‘성취 지위’와 자신들이 자동적으로 확보한 ‘귀속 지위’ 중에서 후자에 더 경도된다고 이야기했다. 내세울만한 성취 지위가 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귀속 지위에 보다 더 관대하다. 하지만 불안한 현실 속에서 귀속 지위로 자꾸 후퇴하는 사람들에게 는 가지고 있는 게 귀속 지위밖에 없어진다. 성별, 문화, 인종 같은 게 그것이다.

불안 분노 걱정 사람 여자

다시 혜화역 시위를 한 번 살펴보자.

혜화역 시위에서 가장 널리 공유된 감정은 아마 몰카에 대한 불안감과 그에 대한 분노일 것이다. 이 불안은 여초 커뮤니티를 통해 공유되면서 더욱 확대된다. 그리고 이는 경찰력에 대한 불신, 남성들과 남성 중심 사회구조가 장악하고 있는 정치권과 기득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여경과 남경 비율을 9:1로 맞추고 여성 경찰청장, 검찰총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구호는 허황되고 진지하지 못한 구호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 어쩌면 이런 허황된 요구 자체가 포퓰리즘의 본질을 짚은 것일 수도 있다.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까지 멕시코 장벽에 대해서 다들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떠올리면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떠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2030 남성 사이에서 페미니즘과 관련한 불안감이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은 관련 커뮤니티 게시글을 조금만 눈팅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들은 여성이 조직적으로 정치권에 압력을 넣고 있고, 언론과 정치권은 이미 여성계의 영향력에 오염되고 타락해 자성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진단한다. 그 결과 2030 남성에게 불리한 법안들이 계속 입법되고 남성에게는 고된 일과 의무만이 남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여기서도 역시 언론, 학계, 정치권이 ‘보통 사람’들인 2030 남성을 버렸다는 배신감과 불안감이 팽배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재의 방송은 소셜미디어가 중앙에서 통제하는 미디어를 우회해서 상당한 규모로 확산되는 것을 보여준 정말 교과서적인 사례다.

그런 의미에서 혜화역 시위는 남녀 진영 모두가 포퓰리즘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혐오 남자 여자 갈등 차별 싸움 증오

우리 안에 괴물이 자라고 있어  

자, 그렇다면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국이 성별 갈등에 기반한 포퓰리즘 시대를 맞이하게 될까? 아마 그건 지나친 과장일 것이다. 사실 성별 갈등 이슈는 인터넷 고관여층에게만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성별 갈등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그 갈등에 몰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팽배해있다(반대쪽 성별에만 대체로 집중하기는 해도 말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남녀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화합해서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사회의 지배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진실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이 이슈는 40대부터는 확장성을 상실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따라서 2030 세대 내에서도 일부만이 몰입하는 한계 때문에 많은 경우 성별 갈등은 인터넷 상의 고인물, 혹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의 예멘 난민에 관한 여론이 보여주는 것은 상황이 조금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 이미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 문화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기성 정치에 대해서도 점차 신뢰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 아닐까? 성별 갈등으로 그렇게 열심히 싸워대던 커뮤니티들이 난민 문제에는 대동단결한 것은 아마 성별 문제나 난민 문제 그 자체의 중요성 말고 다른 것을 더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미 설명 불가능한 모종의 불안감과 불만을 가득 느끼고 있으며, 어디든 간에 그것을 표출할 대상을 찾고 싶어한다. 그 대상은 남성, 혹은 여성, 혹은 예멘 출신 난민일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설령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인식 상에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전혀 아니다. 따라서 모종의 정당성까지 챙길 수 있으며,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상식으로 자리잡은 내용이라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Goya, “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ous”, 1799)

고야,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Goya, “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ous”, 1799)

나는 여기서 몰카, 페미니즘, 미투, 무고죄, 혜화역 시위, 액시스 마이콜, 예멘 난민, 이슬람과 테러의 관계 등에 대한 평가를 하지는 않겠다. 누군가는 내 주장을 두고 확대해석하면서 무언가에 대한 혐오가 가득한 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성별 갈등 이슈나 난민 이슈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똑똑하고 진지한 자세로 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논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짚어보고 싶었던 것은 그 논쟁에서 잠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넓은 시야에서 조명한 전체적인 그림이었다.

물론 한국에서의 포퓰리즘은 서구에서처럼 상당한 규모로 확장되지도 않았고, 그만한 조건도 갖춰져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그저 한국의 포퓰리즘은 분노가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서 미약한 것이 아닐까 하는 심증을 갖게 한다. 당분간은 민주당 정권이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정당으로서 활약할 것이기 때문에, 분노의 대상도 명확하지 않은 인터넷 포퓰리즘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불만에 가득찬 국민이 서로를 믿지 않고 적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민주정의 운영에 있어서 우려할만한 일이다. 이민자를 통해 결속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 역시 딱히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훨씬 다행인 것은 우리는 서구 사회라는 미리 참고해볼 수 있는 선례들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구 사회의 딜레마들을 우리는 아주 약하게만 공유하거나 아예 공유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유리한 점이다. 우리는 유럽연합처럼 오도가도 못하는, 대표성 없는 국제기구에 묶여있지 않다. 우리는 아직 제조업 기반이 탄탄하다. 우리 영토 안에는 통제 불가능한 대규모 이문화 집단이 없다. 서울과 서천 혹은 청송의 차이는 캘리포니아와 루이지애나의 차이만큼 크지 않다.

하지만 지나간 역사,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제 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면 어떨까? 한국에도 민주주의의 위기가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만약 당분간 이어질 민주당 정권이 사회의 불안과 분노를 제 때 처리해주지 못한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탈북자와 같은 이질적 구성원들이 갑작스럽게 상당한 규모로 유입된다면,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계속 겪는다면, 그때 포퓰리즘적 지도자가 부상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2018년 6월에 우리는 그 씨앗만큼은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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