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주기를 맞아, 20일 영등포에 있는 민주노총에서는 한국 정부의 이주민 정책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이주노조 위원장 직무대행부터 이주노동자센터 태국어 상담가, 이주노동자의 방송 뉴스 팀장, 다문화 교육 인권 강사, 재한 네팔인 연합 사무국장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주자들이 '이주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 국제결혼여성 정책, 나아가 다문화가정 자녀 정책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정원 이주노조 교육선전차장은 "지금까지 이주자 관련 토론회는 많았지만 정작 이주자들의 목소리로 이주자 문제를 들어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면서 "이주자 정책에 대해 보다 세밀한 부분까지 이야기 해보기 위해서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 2월 20일, 민주노총 9층 회의실에서는 여수 외국인 보호소 화재 참사 1년, '한국정부의 이주, 이주민 정책' 토론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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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한국 사람들, 가난한 이주자들 이해하리라...실상은 정반대"

이 날 토론회에는 연설자를 포함하여, 현재 민주노총 건물 1층에서 '출입국 관리법 개정안 반대' 농성중인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 총 20여명 정도가 참석해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토론이 이루어졌다. 또 기존의 토론회처럼 딱딱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참석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 이주노동자 방송 뉴스팀장 중국동포 최춘화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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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주노동자인데 이주노동자에 대해 잘 몰랐다"는 중국동포 최춘화(이주노동자의 방송 뉴스팀장)씨는 "예전에 이주노동자 친구들과 파티 같은 행사에서 만났을 때는 그들이 행복한 줄로만 알았다"며 "그런데 촬영을 하고 취재를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이 즐거운 건 정말 순간적인 모습이었고, 사실 그들은 늘 힘들었다"며 "나는 그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 말하곤 울먹였다.

그는 임금을 체불 당했는데도 법도 한국말도 잘 몰라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피해 입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피해자들은 어땠을까"라며 "숨쉬기도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말이 서툴다는 아넨다 구릉(재한 네팔인 사무국장)씨는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이주노조 국제연대 임월산씨가 통역을 해주었다.

3년간 김포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했다는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 역시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다"며 "하지만 한국에 직접 와보니 실상은 정반대였다, 우리는 마치 노예처럼 일해야 했다"고 인종차별과 임금체불 등 자신과 동료들이 겪어야 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을 단순히 돈 버는 곳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다"라며 "이곳을 내 직장이라고 이 일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고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전환을 촉구했다.

'출입국 관리법 개정반대'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허르까(네팔)씨는 "회사 들어가자마자 한국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이 사람 못 먹어서 여기 온거야'라고 말했다"며 "그리고 먹을 게 나올 때마다 '이거 먹어봤어?'라고 물어봤다"고 자신이 겪어야 했던 차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 이주노조는 '출입국 관리법 개정안 반대' 등 이주노동자 정책 개선을 주장하며 76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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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노조 위원장 직무대행인 토르너 림부씨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주노동자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개정을 앞두고 있는 출입국 관리법에 대해 "불법체류자라고 의심되면 길에서 그리고 공장에 들어가서 단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또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용주를 위한 법"이라며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합법화시켜, 더 이상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많은 돈을 내지 않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졌어요"

이정원 이주노조 교육선전차장은 "그동안 이주자 문제가 이주노동자 문제 따로, 국제결혼여성 문제 따로 이야기된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토론회에서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왔던 이주노동자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결혼 여성문제와 다문화 가정 자녀문제역시 함께 논의되어 그 의미가 크다.

한국에 온 지 13년이 되었다는 박 아스라르(다문화교육 인권강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겪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5년 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 이야기 도중 침통해 하는 박아스라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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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이 저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방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들이 울고 있는 거예요. 학교가기 싫다고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애들이 놀린대요. '초코파이'라고. 그 때 정말 부모로서 가슴이 찢어졌어요. 그래서 집사람한테 파키스탄에 가자고 그랬어요. 거기선 차별 안 받을 테니까. 그런데 집사람이 안 된대요. 애들은 여기서 태어났으니까 여기서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고민하던 중에 다문화교육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러한 계기로 박 아스라르씨는 3년 전부터 학교에서 다문화교육 인권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국제결혼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2세, 자식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며 "국제결혼여성 문제와 다문화가정 자녀 문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한국 아빠는 바쁘고 시간이 없고 이주민 엄마는 한국말도 한국사회도 잘 알지 못한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잘 교육할 수 있을까"라고 우려했다.

한편, 오산 이주노동자센터에서 태국어 상담을 하고 있는 와라푼씨는 "국제결혼여성 중 한국인 남편에게 폭행당했거나 이혼당한 사례를 많이 들었다"며 "한국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지마라, 가난해도 자기 나라에서 사는 게 낫다. 이곳은 적응하지 힘든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주자들,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 강조해  

그렇다면 이러한 이주자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주자들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시민단체들도 함께 연대하여 이주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르너 림부씨는 "단결해야만, 주체자로서 당당히 서야만 권리를 얻을 수 있다"며 이주자들간의 연대를 독려했다.
박 이스라르씨는 "이주자에게 이주노동자 단체는 큰 희망"이라면서 "사실 시민단체가 없었다면 나 자신도 이주노동자 정책이 어떤지, 문제점이 뭔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며 "시민단체는 앞으로도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넨다 구룽씨 역시 "발전된 국가인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더욱더 보호받을 수 있도록 시민단체들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주노조는 여수 화재참사 1주기 희생자 추모행사의 일환으로 오는 24일 일요일 오후 2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대규모의 집회를 열 계획이다.

"과격함, 치열함 보다 설득력 있는 노동운동 할 것"

[인터뷰]이주노동자조합 위원장 토르너 림부씨

지난 해 11월, 경찰과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으로 인해 '까지만' 이주노조위원장이 출국조치를 당했다. 토르너 림부씨는 2008년 2월 현재, 그의 뒤를 이어 이주노동자조합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 그가 한국에 온 해는 1992년이고, 2003년 고용허가제 실시와 동시에 미등록 이주노동자 상태가 되어 단속을 피해 전전하다 2004년 명동성당 농성에 합류,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 이주 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토르너 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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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그 후 1년이 지났다. 그때를 돌아보면 어떤 마음인가.

"당시로선 슬프고 비통함 보다, 황당무개함 그 자체였다. '감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이 험한 꼴을 당했다. 어떻게 '보호소'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곳에서 간단한 안전장치 하나 없었는지, 우리의 인권이 이렇게 짓밟힐 수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한국정부에 실망했다.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게 놔두면 안된다."

- 림부씨도 한국에 와 일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나?

"92년에 서울의 한 전기코드 공장에서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일했었다. 2년을 일했는데, 너무 힘들었다. 오전 9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했지만 한 달에 35만원이 고작 이였다. 체력적으로 더는 견뎌내질 못했다. 더 힘들었던 건 상처받은 마음이었다. 사람 가지고 장난쳤다. '사장님'은 직원들을 훈계할 때 한국 사람들은 배제하고 이주노동자들만 싸잡아 욕했다.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선 이유도 그런 부당함 때문 이였나? 투쟁가가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

"무엇보다 한국정부의 정책에 너무나 실망했다. 2003년 7월,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고, 사용자 중심의 이주노동법인 '고용허가제'가 실시되었을 때다. 당시 나는 다녔던 회사가 있었는데, 법 발효와 동시에 계약 해지 당했다. 이후, 4개월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미등록자'로 전환되었다. 일명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관해서는 처벌 및 감금 등의 규정이 있었기에 고달픈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더 이상 굴하지 않겠다' 생각해, 당시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그게 시작 이었다."

- 미등록 이주노동자, 흔히 말해 '불법체류자'는 왜 자꾸 늘어난다고 생각하나?

“이주노동자, 그들은 배고픈 철새다. 단지 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떠나온 철새다. 가난을 탈피하고자 온 슬픈 철새다. 누구나 고향을 떠나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에 가면 배부를 수 있다'는 기대하나로 2만원으로 한 달을 버티며 거액의 브로커 비용을 마련한다. 허나, 한국에 와서 돌아온 건 "'송출비리'였다"는 말 한 마디와 산더미처럼 쌓인 빚과 이자다. 이제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이런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정부의 제도가 하나도 만들어 진 게 없다는 게 핵심이다."

- 오늘로 76일째 이주민 정책과 관련해 투쟁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변화의 흐름이 포착되고 있는가?

"변화의 흐름은 내가 명동성당에서 투쟁하기 시작한 2004년부터 있었다. 비록 현재 전국의 노동운동단체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지만, 여러 곳에서 우리 뜻을 표명하면 의외로 동참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우리는 노동운동이라고 해서 치열하고 과격하게 싸우기보다 한국 사람들을 설득시키고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데 주안을 둘 것이다. 현재로서 우리가 원하는 변화는 노동허가제를 통해 차별 없고 합의가 가능한 노사관계를 만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