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컨테이너에 방치된 네팔 전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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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날짜, 기자

2011-11-07 07:00 CBS 조혜령 기자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품삯과 함께 숙식을 제공받는다. 한 번 계약하면 거처를 마음대로 옮길 수 없고 옮길 때에는 주인의 ‘허락’이 담긴 각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일손이 부족한 주인은 다른 이유를 들먹이며 일꾼에게 족쇄를 채운다.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2011년 21세기에 이루어지고 있는 진짜 사건이다. 다만 일꾼은 한국인이 아닌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다. 고용의 권한이 업주에게 주어지는 현행법상 공장을 나가면 바로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이주 노동자들. 근로자가 아닌 노예가 된 사람들의 절박한 사연과 고용허가제가 가진 문제점을 살펴본다.[편집자주]

"외국인 노동자한테 공짜로 기술 가르쳐주고 일 끝나면 퇴직금까지 챙겨주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 경기도에서 비닐 재생공장을 운영하는 사장 김모(53)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는 최근 공장을 옮기게 허락해 달라는 필리핀 공장 근로자 2명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탈 신고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봐야 우리 공장이 소중한 걸 알지" 비닐 녹는 냄새에 두통을 호소하던 외국인 노동자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사장의 신고에 졸지에 불법 체류자 신세로 전락했다.

월급에 퇴직금까지 챙겨주는 "천국 같은 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모두 70만명. 이 중 고용허가제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동남아시아 노동자는 20만명 정도다.

'천국의 노동자'들은 그러나 사장의 허락 없이는 공장을 옮기는 것은 물론, 공장 밖을 나갈 수도 없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근로계약을 맺고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는 업주가 이직 허가서(release paper)를 써주지 않으면 직장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제목>>> 이직 요구하자 쓰레기 컨테이너에 두 달간 방치

"여기보십시오."L(37)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회색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지난 1일 경기도 남양주시 의류재생공장.

헌옷가지 더미 옆에 세워진 컨테이너에 네팔인 L씨와 M(37)씨가 가을 햇볕을 쬐며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조심스럽게 컨테이너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공간에는 지저분한 이불과 잡동사니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사장님이 마련해 준 기숙사"인 컨테이너엔 화장실은커녕 손을 씻을 공간조차 없었다. 발밑 탁자 위엔 가스레인지와 먼지 앉은 그릇이 빼곡했다. 가스레인지는 고장난지 오래된 듯 보였고 시커먼 물이 담긴 물그릇엔 벌레들이 둥둥 떠다녔다. 방 곳곳에는 신발과 우산 등 잡동사니가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L씨와 M씨는 지저분한 이곳에서 과자만 먹으며 두 달째 살고 있다고 했다. "사장님 밥 안 줘요. 언제나 과자. 냉장고, 밥솥도 가져갔어요. 나쁜 사장님."

지난 8월 L씨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왔다. 네팔에서 그는 대학 교수였다. 수입이 충분하지 않았던 L씨는 외국에서의 취업을 택했고 네팔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친절함에 반해 한국으로 왔다.

그러나 네팔에서 받은 한국에 대한 호감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의류 재생공장의 노동은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고됐다. 산더미처럼 쌓인 옷을 맨손으로 긁어낸 탓에 손톱도 몽땅 빠졌다.

당장 회사를 옮기고 싶었지만 공장주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장은 L씨와 M씨를 쓰레기장 같은 컨테이너에 두 달간 방치했다. 일도 시키지 않았다. 월급을 받지 못한 이들은 "제발 도와달라"며 울먹였다.

"사장님이 일 안돼, 사인(sign) 안돼. 월급 안 주고. How can I sleep here. Many cold night.(어떻게 여기서 살아요. 매일 추워요) 바꿔주는 것 원해요."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25조에 따르면 외국인노동자는 임금 체불, 폭행 등의 특정 사유가 있을 때에만 이직할 수 있으며 이마저도 3차례로 제한된다.

오산노동자문화센터 김승만 간사는 "요샌 3년 통으로 계약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외국인 노동자가 열악한 3D 사업장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예가 아니잖아요. 몸이 힘들어서, 위험해서 작업 거부를 할 수 있는데 이건 노예 관계에요. 고용허가제로 왔지만 노예와 다름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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