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당했다"…의원회관서 '이주여성 미투' 사례발표회

"사장·시댁식구·이주남성노동자·지인 등의 성폭력에 시달려"
언어 장벽과 체류신분 탓에 항의도 못해…"종합대책 마련하라" 

이주여성들과 여성인권단체 관계자들이 9일 국회의원회관 제4간담회장에서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를 외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1. 한국으로 시집간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방한한 베트남 여성 A씨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여동생의 요청으로 농사일을 도우러 갔다가 사돈(여동생 시아버지) 친구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러는 동안 사돈은 망을 봐줬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의 얼굴을 대하고 피해 경험을 반복 진술하는 고통을 겪다가 입원까지 했다. A씨는 2차 피해로 인해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고 퇴행적인 이상행동까지 보이게 됐는데도 가해자 자녀들은 집요하게 합의를 요구했다. 성폭행을 당한 사실은 고향에까지 알려져 온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야만 했다.

#2. 캄보디아 여성 B씨는 2016년 취업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성폭행을 당했다. 일도 서툴고 한국말도 잘 모르고 주변 지리에 어두운 상태에서 사장이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가 피해를 본 것이다. B씨는 사장이 두렵기도 하고 이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워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못한 채 참고 지냈다. 사장은 그 뒤로도 성폭행과 성추행을 그치지 않았다. 싫다고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사촌언니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주여성쉼터에 입소해 법률 지원을 받아 소송을 제기했다.

#3. 태국 여성 C씨는 90일 무비자로 한국에 와서 마사지 일을 하면 월 150만∼20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대구의 한 마사지숍에 취직했다. 한국과 태국 중개업소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가자마자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하루에 남성 5∼7명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라고 강요받았다. 마사지 일만 하는 줄 알고 왔으니 돌아가겠다가 말하자 사장은 항공료와 중개수수료를 합쳐 1천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돈을 벌려고 왔다가 갑자기 빚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못 내겠다고 하다 태국의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협박을 당했다.

#4. 중국의 여교사 D씨는 한국 문화에 매료돼 한국어학당에 입학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가해자는 한국 문화를 소개해준다며 외딴곳으로 유인해 술을 강요했다. 술 마시기를 거부하자 가해자는 혼자 마시다가 음주운전을 핑계로 모텔에 쉬었다 가자고 했다. D씨는 하는 수 없이 따라갔다가 폭력과 협박을 동반한 성폭행을 당했다. 6시간 만에 겨우 도망쳤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기숙사에 돌아왔으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어 외출도 제대로 못하며 지내고 있다.

이주여성들도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대열에 가세했다.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4간담회장에서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전국이주여성쉼터협의회 주최로 열린 '이주여성들의 미투(Me Too)' 사례 발표회를 통해서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공존'이란 제목으로 발표에 나선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의 레티마이투 씨는 A씨의 사례와 함께 형부에게 성추행당한 사례, 남편에게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받는 사례 등을 소개하며 "한국 국적을 얻기 전에는 남편의 동의 없이 체류 기간 연장을 받을 수 없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기도 힘들어 성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필리핀 출신의 이주여성 통역사 오혜진 씨는 "결혼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신부 여동생이 형부 될 사람한테 성폭행을 당했으나 1심 법원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면서 "법률 지식이 없고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외국인 여성이 피해 증거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2심에서는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B씨의 사례를 소개한 캄보디아공동체의 캇소파니 씨는 "사업장 기숙사의 남녀 구분이 돼 있지 않아 이주남성 노동자에게 성폭행을 당하거나 숙소의 잠금장치가 없어 성폭력 위험에 노출된 사례 등이 많다"면서 "사업주의 동의 없이 사업장을 이탈하면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이 되는 고용허가제 규정이 피해자를 더욱 괴롭히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의 니감시리 스리준 씨는 "마사지업소에서 성매매를 강요당한 여성들이 고통을 호소하면 주변에서 '그것도 모르고 취직했느냐'라고 비난하는 2차 피해에 시달린다"고 폭로했고, 서울이주여성상담센터 동애화 씨는 "D씨가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 한국에 대한 나쁜 기억만 남아 있을 것"이라며 지지와 연대를 호소했다.

이주여성 5명의 발표가 끝난 뒤 이주여성 자조모임 톡투미(Talk to Me)의 이레샤 대표, 신영숙 전국이주여성쉼터협의회 회장,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대표는 '이주여성 미투 참가자 일동' 명의로 ▲이주여성 성폭력 피해 실태조사와 의료 지원 ▲피해 이주여성 체류 보장 ▲성폭력 피해 신고 즉시 사업장 변경 ▲기숙사 기준 마련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 ▲선주민 배우자 인권 교육 등 요구 사항을 낭독했다.

이어 발표자와 관련 단체 대표자 등은 손팻말을 들고 '미투'와 '위드 유'(With You, 당신과 함께)를 외쳤다.

그러나 이날도 정작 피해 당사자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국내외에서 미투 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들은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고 '미투'를 외치지 못하는 가장 약한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사회를 맡은 강혜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공동대표도 "상담자들에게 이주여성 성폭력 피해 사례 접수는 일상에 가깝지만 아직도 신분 노출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면서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직접 취재는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보도진에게 당부했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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