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으로 타자화되며 경계 밖에 놓은 이주민, 이주노동자, 북한이탈주민, 이주청소년, 난민신청자 등 다양한 이주민들의 삶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드러나지 않았던,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주민 구술생애사 프로젝트 <담을 허물다>가 2017년 말 경기이주공대위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당신의(이주민) 목소리를 '담'아, 높게 쌓인 '담'(우리 안의 편견, 차별)을 무너뜨리고자 한 4명의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하고자 한다. - 편집자 주

"고향 친구들 모두 한국에 왔어요. 다 여기 있어요, 한국에. 네팔에서 가족 중 한 명이 E-9 비자로 한국에 와서 돈을 벌면, 그 돈으로 다른 가족 모두가 살 수 있거든요."

태어나 자란 네팔을 떠나는 것,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하는 것은 오쟈 씨와 또래의 네팔 청년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쟈 씨는 한국에 오기 전 '필더보이'로 인도에서 일했다. 회사의 지시에 따라 사무실로 서류나 돈, 책을 준비해 오토바이로 전달하는 일을 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한 달 꼬박 일하고 받는 월급은 한국 돈으로 20만 원, 많을 때는 25만 원 남짓한 수준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인도에 갔지만, 네팔과 별반 상황이 다르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그는 고향에 돌아와 친구들처럼 한국행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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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이 한방에 자야 했어요. 기숙사 비용도 내야 했고요. 월급에서 10만 원씩 잘라갔어요. 하숙비, 전기비, 인터넷비. 이렇게 해서 1인당 10만 원씩 기숙사비용으로 잘랐어요."

인도에서 네팔로 돌아와 카트만두에서 6개월가량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시험에 합격해 운 좋게 한국에 오게 된 오쟈 씨. 그는 인천 서구의 와이어 커팅 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한국생활과 달리 현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눕기에도 빠듯하고, 화장실도 없는 컨테이너에서의 생활이었다.

"회사에 가서 부장님한테,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니까 '안녕하세요 하지마. 안녕하십니까! 이렇게해' 라고 하더라고요."

그는 한국에서 첫 출근길에 곤욕을 치렀다. 출근하며 인사를 건넨 오쟈 씨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잘라먹은 한국인 부장은, 출근할 때 고개를 숙이고 다니라고, 눈을 깔고 다니라고 말했다. 심지어 사장과 부인은 오쟈 씨의 인사도 받지 않았다.

"네팔에서 오자마자 한 달 동안 매일 같이 욕먹고, 맞고 그랬어요. '시발', '이 새끼야' 이런 욕을 했어요."

업무지시를 하는 부장은 매일 같이 욕을 했고, 때로는 폭행도 가했다. 일도 많이 힘들었다. 그가 맡은 업무는 운반이었다. 60~70kg가량의 와이어 뭉치를 혼자서 들어 날랐다. 고된 업무로 1년 정도 지나자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허리가 아팠다.

"병원에 갔더니,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서 그런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에 가서 얘기했죠. 몸이 아프다고요. 회사를 옮겨 달라고요. 그러자 회사에선 '일해! 일 안 할 거면 네팔 가!'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오쟈 씨는 넉 달 가까이 악몽 같은 일상을 보냈다. 출근한 그에게 부장은 아프냐고 묻곤, 아프다고 답하면, '일 없어! 가서 쉬어!'라고 하며 그를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때론 아무 의미 없이 무거운 재료를 이곳저곳으로 들어 나르도록 시켰고, 어떤때는 2시간만 일을 시키고는 일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그가 아프다고 하니 회사에선 컨테이너가 아닌 다른 기숙사(아파트)로 그를 보냈다. 그리고는 월급에서 20만 원을 기숙사비로 잘라갔다.

결국,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쟈씨는 스스로 노동부를 찾았지만, 노동부 직원은 모르겠다며, 사장에게 말해서 사업장을 변경하라고 했다. 도움은 커녕,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부 직원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이주노조였다. 우연히 친구에게 건네받은 전화로 이주노조 위원장(네팔에서 온 우다야 라이)에게 사정을 말한 그는, 14개월 만에 사업장을 변경했다.

"평택에서 일하던 회사, 사장님도, 부장님도 안 좋은 사람이었어요. 회사에선 '네팔로 돌아가고 싶냐, 말안 들으면 비자 연장 안 해줘!'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오쟈 씨는 우여곡절 끝에 안성·평택에 있는 플라스틱 사출 공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농촌에 있는 공장에서 오쟈 씨와 동료들은 일이 없을 때는, 회사 밖의 농장에 불려가 풀을 베야 했다. 정해진 업무가 아닌 다른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묻자, 회사에선 '시키는 대로 해!'라고 답했다. 3년 시효의 비자가 만료되면, 1년 10개월을 연장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고용허가제'의 비자 연장을 미끼로 회사에서는 부당한 일을 강요했다. 

12개월이 넘게 일하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11개월짜리 계약서를 쓰도록 강요하고, 계약 기간이 끝나면 공장의 다른 부서로 재계약을 맺게 하는 꼼수를 쓰는 회사였다. 오쟈 씨는 또 한 번 이주노조의 도움을 받아 사업장을 변경했다. 그렇게 지금 일하는 천안의 볼트·너트 제조회사에 터를 잡았다.

 집회에서 열정적으로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는 오쟈 씨. 그에게 이주노조는 원동력이자 든든한 울타리이다.
▲  집회에서 열정적으로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는 오쟈 씨. 그에게 이주노조는 원동력이자 든든한 울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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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의 허락 없이는 사업장 변경이 불가능하고, '사장님'이 3년을 근무한 이후 비자 연장을 해주지 않으면 더 일하고 싶어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재의 고용허가제의 부당함을 몸소 느낀 오쟈 씨는 이주노조의 활동과 고용허가제 폐지를 촉구하는 행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고용허가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그에게 기대고 있는 가족들의 삶도 보장이 되지않기 때문에, 오쟈 씨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이주노조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오쟈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한국경제의 필요에 부응한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대로면 충분한가. 정말 그런가. 계속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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