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 인정률 1.5%… 그래도 꿈과 희망 포기할 수 없어요
부활의 삶 꿈꾸는 ‘동두천 난민공동체’
2018. 04. 29발행 [14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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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두천 난민공동체 가족들과 이곳을 찾은 수녀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유시환 활동가 제공



집과 가족을 떠난 이들. 생명을 위협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그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난 이들. 난민(難民, refugee)들이다. 어떤 고통이 그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게 했을까. 우린 여전히 그들이 어디서, 왜 왔는지 잘 알지 못한다. 국경 넘어 머나먼 한국까지 온 난민 신청자 수는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3만 2700여 명. 그러나 높은 제도적 장벽 탓에 입국 자체가 안 되거나 입국해도 사실상 제대로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거스를 수 없는 난민의 이동과 유입은 시대의 흐름이 됐다. 이민의 날(4월 29일)을 맞아 난민들과 함께 ‘자립’과 새로운 ‘부활의 삶’을 꿈꾸는 경기 동두천시 보산동의 ‘동두천 난민공동체’를 찾았다.

“웰컴!”, “안녕하세요.”

오래된 아파트와 낮은 빌라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동두천 보산동의 한적한 동네. 조금은 허름한 빌라 2층에 들어서자 환영 인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난민들의 환영’이 가득한 이곳은 2017년 10월 문을 연 ‘동두천 난민공동체’다. 25평 남짓한 이 집에 이른 아침부터 와 있는 이들은 모두 조국이 있는 아프리카를 떠나 한국에 온 난민들이다. 나이지리아에서 온 기프트 오코이, 플로렌스, 앤, 그레이스씨와 우간다에서 온 레이첼씨다.

가만 보니 모두 양말을 쌓아두고 ‘작업 삼매경’이다. 인근 공장에서 갖다 준 양말을 ‘상품’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 공동체를 만든 난민활동가 유시환(요한, 34)씨가 수소문해 이들에게 부업을 마련해줬다.

“단순한 작업이지만 재미있어요. 친구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고, 한국 삶에 대한 경험도 나누고요.” (오코이씨)

포장까지 개당 30원. 저녁까지 이어지는 작업이지만 그나마 할 일이 있어 만족한다. 동병상련 처지의 이웃과 만나 힘겨움을 달랠 수 있어서다. 그렇다고 부업 수당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 기금을 마련하고자 자발적으로 매일 작업하고 있다. 나와 우리의 ‘자립’을 위해서다.

‘동두천 난민공동체’는 평신도 난민활동가인 유씨가 사비를 털어 장만한 거처다. 난민들을 위해 월세로 집을 마련했고, 방 한 칸 빼고 거실과 부엌 모두 난민을 위한 공간으로 쓰고 있다. 나머지 방에는 갈 곳 없는 난민이 묵을 수 있는 2층 침대가 있다. 난민들의 ‘마을회관’이자 ‘쉼터’인 셈이다. 교회나 정부가 아닌 일반인이 난민공동체를 직접 조성해 운영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지난 2월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가 공동체를 축복해주기도 했다.

공동체에 가입한 난민 회원은 87명. 나이지리아, 라이베리아, 우간다,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 토고 등 대부분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로, 모두 ‘보산동 주민’이다. 이 동네에만 난민 400~500명이 좁은 쪽방에 살고 있다. 미군 부대가 있던 지역이라 주민들도 외국인과 친근하다.

이들은 그야말로 ‘공동체 삶’을 살고 있다. 함께 요리도 하고, 그림도 배우고, 진솔한 고민도 나눈다. 한껏 멋을 부리고 소풍도 다녀오고, 아이들과 함께 피자가게를 찾아 모처럼 배불리 먹고 오기도 한다. 조직도 구성돼 있다. 대외협력팀은 공동체 소식을, 복지팀은 특히 도움이 필요한 가정에 생필품을 나눠준다. 공동체 리더 17명은 정기회의를 열며 공동체를 꾸린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으로 ‘새 희망’을 키워가고 있다. 대부분 천주교ㆍ개신교 신자인 이들은 모든 모임을 기도로 시작하고 끝맺는다. 이들이 희망하는 것은 단 하나. 한국 사회에서 난민으로 인정받는 일이다.

▲ 동두천 난민공동체 가족들이 보산역 앞에서 청소를 함께하며 주변 환경 가꾸기에도 동참하고 있다.


난민은 자국의 인종, 종교, 정치적, 사상적 박해로 인해 타지로 탈출한 이들이다. 20세기 들어 러시아 혁명, 유다인 탄압, 제2차 세계대전 등으로 발생한 피난민과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서 수상가옥에 사는 ‘보트 피플’ 등이 그 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부족 간 전쟁, 군부정권의 탄압, 종교 박해가 빈발해 수많은 난민을 낳고 있다. 오늘날 전 세계 난민은 지구촌 인구의 1%인 약 7700만 명. 한국에는 지난해에만 1만여 명이 난민으로 입국했다.

대한민국은 2013년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했다. 출입국항 신청→면담→회부 심사를 통과하면 인도적 체류 허가(G-1 비자 발급)가 난다. 궁극적인 체류 허가(F-1 비자)를 받으려면 난민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박해받은 상황과 위험의 공포를 느낀 사유가 충분히 입증돼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가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난민 인정률은 1.51%. 신청자 6000여 명 가운데 91명만 난민 인정을 받았다.

동두천 난민공동체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난민 인정을 기다리는 난민 인정 신청자들이다. 이들은 가슴 속에 조국에서 겪은 아픔을 안고 있지만, 난민공동체의 진정한 자립은 물론 난민 인정으로 자유를 얻어 한국에서의 ‘제2의 삶’을 꿈꾸고 있다.

오코이씨는 나이지리아에서 여성 할례와 개종을 강요하고 가족을 위협했던 종교 탄압을 피해 한국에 왔다. 일용직 건설 현장에서 매일 7~10만 원 남짓 벌어오는 남편의 일당으로 난민 인정 통과를 위한 소송비를 마련 중이다. 오코이씨는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 마음껏 다니고, 일하고 살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좋겠다. 나를 도와줄 한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난민 친구들을 위해 매일 하느님께 기도한다”고 했다.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생으로 왔다가 자신을 도와주던 양아버지가 반정부 시위를 벌인 것으로 오해를 받고 살해당하면서 졸지에 난민이 된 우간다 출신 레이첼씨도 난민 인정 재신청 절차를 밟고 있다. 레이첼씨는 “한국은 평화롭고 안전하다.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 한국어도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소망을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의 존엄이 국가 안보에 우선한다면서 “각국 정부는 난민을 환영하고, 보호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촉진하고, 사회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때마다 난민에 대한 존엄성과 인권을 역설하고 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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