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배 타면 못내려요"… 코로나로 발 묶인 외국선원들

 
기사입력2020.07.21. 오후 5:41
최종수정2020.07.21. 오후 9:21
기간 채워도 선원 교대 제대로 안돼
1년 넘게 선상근무 선원 다수 발생
피해 우려에 하소연 못하고 속앓이
국제법상 1년 이상 연속 승선 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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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현지 송출회사를 통해 한국 선사에서 갑판원으로 근무하는 필리핀인 A씨는 16개월째 승선 중이다. 예정됐던 것보다 반년 넘게 배를 더 타고 있다. 하지만 언제 내릴 수 있을 지 기약은 없다. 코로나19로 교대가 가능한 항구가 많이 줄어서다. 얼마 전 한국으로 들어오는 길에 필리핀 근해를 지났다는 A씨는 가족들이 그리워 한참을 선창만 내다봤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교대에 어려움을 겪는 선원이 늘고 있다. 통상 10개월 승선하면 교대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최근엔 1년이 넘어도 교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본인 의사에 반해 1년 넘게 선박에서 고립돼 근무하게 된 선원들은 우울감까지 호소하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한 결과 국내 유력 선사 상당수에서 국제규약을 어기고 선원을 12개월 이상 승선시킨 사례가 파악됐다. 해당 선사들은 계약상 지급토록 돼 있는 월급과 수당 외에 장기승선으로 인한 별도의 보상은 제공하지 않고 있다.

"한국 배 타면 못내려" 선원들 눈물


21일 ILO(국제노동기구) MLC(해사노동협약)에 따르면 국제 항행에 종사하는 모든 선박 선원은 연속해 12개월 이상 승선할 수 없다. 규정을 위반할 경우 해당 선원은 즉시 하선 조치되고 선박도 시정권고와 출항금지 등 제재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규정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유명무실해졌다. 선원들의 하선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가 많은데다 하선 뒤 자가격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선사가 부담해야 해 선사가 교대를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지가 국내 주요선사 6곳에서 근무하는 선원과 해당 선사 선원명부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해당 선사 전부에서 1년 이상 승선하고 있는 선원이 발견됐다. 대부분이 필리핀 선원들로 짧게는 1년 1개월, 길게는 1년 4개월 이상 승선 중인 상태다.
1년 2개월 간 승선 중인 B씨는 "어린 딸이 있어서 보러 가고 싶은데 한국인 사관들이 계속 하선이 안 된다고 한다"며 "필리핀 송출회사에 말을 해도 사관들 통해서 한국 선사에 말해보라고 하는데 불만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알 수가 없다"고 갑갑해했다.

현지 업체에 고용돼 파견 형태로 한국 선사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선원들은 부당한 상황에 저항하기 쉽지 않다. 1년째 승선 중인 C씨는 "한국 선사는 유럽에 비해 팬데믹(코로나19 대유행) 이전에도 계약기간이 최소 9개월 이상으로 너무 길었다"며 "재계약시에 불이익이 있을까봐 문제제기를 하는 게 불가능한데, 한국인만 교대해주니 소외감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1년을 넘긴 뒤 한국 선사에 교대요청을 했다는 D씨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서 답답해하고 있다. D씨는 "유럽 선사에선 선원이 직접 휴가요청을 보낼 수 있고, 선사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를 해서 답변을 보내주는 편"이라며 "한국처럼 그냥 '안 된다'고만 하지 않는다"고 분개했다.

선사들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어"


이에 대해 선사들은 "코로나19로 어쩔 수 없다"고 해명했다. 선원 하선을 받아주는 항구가 많지 않을 뿐더러 맞교대할 선원의 입국도 제한적이란 것이다. 한 선사 관계자는 "지금 유럽에선 외국인 입국도 안 되고 하선해서 돌아갈 비행편을 구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며 "1년이 넘었다고 바로 교대할 수 있는 선사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선사 관계자는 "1~2개월 정도 규정을 초과한 사례는 있지만 우리도 4~5개월 넘게 태우고 있을 이유가 없다"며 "한국에서 자가격리비용까지 다 부담해서 교대해 보낸 사례가 20명 이상이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호주와 파나마 등 팬데믹 이후에도 국제규정을 엄격히 따르는 국가에선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 한국 선사 중에서도 이들 국가에 기항하는 선박을 운용하는 경우 1년 이상 된 선원을 미리 교대한 뒤 입항한다. 입항 선박에 1년 넘은 선원이 승선해 있을 경우 법에 따라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pen@fnnews.com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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