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칼럼]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그리고 “우리도 난민이었다”
  •  금강일보
  •  승인 2018.07.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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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한남대 사학과 교수
 

독일역사박물관 첫 전시실 입구에는 디지털 지도가 하나 걸려있다. 게르만 족 이동 시기부터 신성로마 제국 시기, 종교 개혁 이후 혼란기, 거의 전 유럽을 제패했던 히틀러의 제3제국을 거쳐 분단과 통일을 이룬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경선은 시시각각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 지도가 왜 여기 걸려있을까, 도대체 어디가 독일인가? 역사 속에 발생한 정치, 경제, 종교적 격변은 국경을 무수히 바꾸고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가며 함께 엉켜서 살았다. 과연 독일인은 누구인가?

오래 전 독일 유학 시절 한 자유주의 정당의 선거 슬로건이 기억난다.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 극우파에 의해 이주민 문제가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됐을 때다. 엄격하게 보아 국제법상 난민으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아프리카, 중동의 많은 사람들이 부유하고 살기 좋은 독일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하던 시절이었다.

밀려드는 가난한 외국인들을 거부하는 인종적 선동에 아랑곳않고 의연하게 “우리는 모두 외국인입니다.”라고 외쳤던 정당 슬로건. 그리고 그에 대해 공감을 표현하던 독일인들의 모습은 잊을 수 없다. 사실 나도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시대가 변해서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에 접어든 지 이미 오래다. 거리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낯설지 않다. 냉전 이래 국경의 문턱이 자본과 인구 이동으로 자유로워진 탓이다. 우리 젊은이들도 배낭을 메고 비자없이 세계를 여행하고 워킹 홀리데이를 보내며 일자리도 찾는 시대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세계화가 진전하면서 난민 문제는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특히 유럽은 최근 몇 년 간 시리아, 예멘 등 중동 도처에서 발발한 내전을 피해 몰려드는 난민 때문에 논쟁이 뜨겁다. 점증하는 반(反) 난민 정서로 여러 나라의 정당 지형도가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어 심각한 우려를 자아낼 정도다. 독일에 들어온 난민신청자 수가 그 절정에 달했던 2016년엔 74만 명, 지난해엔 진정세가 회복돼 22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런 우려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2017년 베를린에 체류하며 가까이서 난민 문제를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통일 후 번성하고 있는 수도로 오는 난민이 대략 한 달에 650~750명, 어떤 날은 하루에만 60명이 신청을 한다고 했다. 베를린 사람들은 이런 사태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베를린 시내 여러 지역엔 난민 수용시설이 분산, 설치돼 있고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희망하는 사람들이 여러 분야에서 각자에게 맞는 시간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도 작동하고 있었다. 어학 교육, 어린이들과의 놀이, 관공서 방문시 동반, 기증된 물품 배급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유모차나 자전거, 침대, 휴대폰 등 필요한 물품 기증을 요청하는 SNS도 신속하게 작동했다.

인종주의로 끔찍한 비극을 경험했던 과거사에 대한 반성, 19세기 이래 국민국가, 국민 정체성 모색에 몰두해 온 배타적 민족주의 역사교육이 거듭난 결과다. 최근 독일 역사교육에서 민족은 유럽사 내지 세계사의 맥락에서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과거 강력했던 국가 서사(Narrative)가 사라졌다. 더 글로벌화되고 다양한 세계 역사를 제시하며 그런 세계 안에서 상대시되는 독일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 글로벌한 맥락에서 “우리는 모두 외국인이다”라는 구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우리도 난민이었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공식블로그에 올라있는 글 제목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당시 우리도 가련한 난민이었다. 전쟁을 피해 제주에 들어온 예멘 난민이 500명이라고 했나? 새로운 역사인식과 글로벌한 시민의식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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