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잘리고 부러지면 이주노동자도 똑같이 아프다 [포토 뉴스]

1990년 12월 18일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을 채택한 유엔은 협약 발효를 기념해 2000년부터 매년 12월 18일을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지난 9일 민주노총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중대재해대응 및 보건관리방안 모색 워크숍’ 자료에 따르면 2019년 7월까지 국내 이주민의 수는 약 242만명이다. 이 가운데 취업자격 등록 이주민의 수는 약 58만명이지만, 여기에 미등록 이주노동자까지 합치면 100만에서 150만명 정도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100만명이 넘는 이주노동자가 국내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동현장의 이주노동자들은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 위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이주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 숫자는 7375명으로 전년도 6409명에 비해 15%가량 증가했다. 지난해에만 하루에 20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노동현장에서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정주노동자의 산업재해율은 0.71%에서 0.51%로 감소했지만 이주노동자는 0.96%에서 1.08%로 오히려 증가하기도 했다.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신고율은 고작 24%다. 산재신청을 하지 못한 이주노동자를 포함하면 보다 더 많은 노동현장의 이주노동자들이 다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경기도 포천 일대 공장에서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의 모습이다. 국내에서 일하는 100만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안전을 위협받고 있다. 민주노총 자료를 보면 지난해 산업재해를 당한 이주노동자는 7375명으로 전년도 6409명에 비해 15%가량 증가했다. 김달성 목사는 이주노동자 산재 신고율이 24%에 불과하다고 했다. 12월18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이다. |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 제공
김 목사는 몇 해 전부터 노동현장에서 다친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가 직접 만난 포천 지역에서 산업재해를 겪은 이주노동자들의 사진과 사연들을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을 하루 앞두고 모아봤다. 사례의 사연들은 김 목사의 페이스북에서 발췌했다.

사례 1. 손가락 두 개 잘린 바우만

/김달성 목사 제공
필리핀에서 온 바우만(가명)은 포천의 한 가구공장에서 합판을 자르는 일을 했다. 입국한 지 넉달만에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그는 입사하자마자 안전교육도 없이 위험한 기계들이 즐비한 노동현장에 투입되었다. 그는 입국 두 달 전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례 2. 네팔서 온 니플레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니플레 씨는 10년 가까이 한국에서 일했다. 지난 5년 동안은 유해물질을 취급하는 화학공장에서 일했다. 허술한 가건물 기숙사에서 살며 밤샘노동을 밥먹듯하던 그는 결핵성 질환에 걸렸다. 폐결핵이 이제 결핵성 관절염이 되었다. 출입국관리소는 최근 그에게 취업 비자 만기를 이유로 출국 명령을 내렸다. 두 자녀의 아빠인 그는 한국에서 얻은 병을 한국에서 치료하기 원한다.

사례 3. 미얀마에서 온 오잉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미얀마에서 온 오잉(가명)은 닭가공공장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렸다. 하루 11시간씩 칼로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미얀마에서 취업비자로 들어온 지 다섯달만이다.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 물정도 모르는 그는 산재보상보험에 대해서도 물론 몰랐다. 뒤늦게 보상보험을 알게 된 그가 산재보험을 신청하려고 했으나 회사에서 방해했다. 이주노동자에게 적용되는 고용허가제 아래에서 고용주의 눈치를 보는 그는 결국 산재보상 신청을 포기했다.

사례 4. 네팔에서 온 사미르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한국말을 곧잘하는 사미르(가명)는 일하던 공장의 기계가 폭발하며 얼굴 한 쪽과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다. 김 목사에 따르면 그가 일한 공장은 ‘산재다발공장’이었다. 비닐장판 재료를 만드는 공장에서 지난 몇년 동안 사미르가 목격한 사고만해도 7번이 넘었다. 폭발에 의한 큰 화상이 세번, 한 쪽 발가락이 다 잘린 사고가 한 번, 한 쪽 눈 실명,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깊이 찢어진 사고 등.

사례 5. 미얀마에서 온 샨나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미얀마에서 취업비자를 갖고 들어와 공장에서 일한 샨나(가명)는 넉달만에 손가락이 잘렸다. 갈비공장에서 소갈비를 자르는 기계 앞에서 하루 11시간씩 일하다 사고를 당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해준 공장에서 입사한지 며칠만에 갈비 자르는 일을 맡았다.

사례 6. 캄보디아에서 온 탐툰

/김달성 목사 제공
캄보디아에서 온 탐툰(가명)은 프레스에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사고난 공장을 옮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고용주가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 그는 ‘산재다발공장’에서 계속 일하는 것을 그는 몹시 두려워한다. 그는 치료가 끝나는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 먹고 있다.

사례 7. 태국에서 온 세 아이의 엄마 카라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태국에서 온 카라(가명, 30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한국에 와 공장에서 일한 지 세 달만에 손가락 세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안전교육도 받은 적 없는 그녀는 안정장치 조차 없는 기계 앞에서 일했다. 그녀가 일한 공장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열두명이나 있었다.

사례 8. 인도에서 온 산디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인도에서 온 산디(가명)는 난민비자를 갖고 공장에서 일했다. 식품공장에서 칼로 육류를 가공하다 엄지손가락과 손목을 다쳤다. “사장이 날 보고 회사 밖에서 다쳤다고 해요.” 그녀가 법에 따라 산재보상신청을 하려고 하자 고용주는 이를 방해했다.

사례 9. 필리핀에서 온 잭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잭(가명)은 3년 전부터 플라스틱 공장에서 일했다. 필리핀에 두 아이를 두고 온 그는 주 5일 하루 12시간씩 밤샘노동을 했다. 기계 앞에서 야간 노동을 하던 그는 새벽에 손가락이 잘렸다. 그가 일했던 공장에 안전장치는 없었다. 산재보상신청을 하려했지만 회사측이 훼방을 많이 해 애를 먹었다고 김 목사는 밝혔다.

사례 10. 캄보디아에서 온 건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기획사진/김달성 목사 제공
캄보디아에서 온 건(가명 20대)은 6년째 국내의 한 섬유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 회사에서 일하던 중 손을 다쳤다. 그가 산재보다 더 힘들어 하는 건 회사 관리직원들의 언어폭력이다. 회사의 임금 계산을 엉터리로 한 것은 물론 이마저도 체불하기 일수였다. 또한 매달 기숙사비까지 받아갔다. 입사 1년이 지난 때부터 건은 직장을 옮기기 위해 고용주에 요구했지만, 고용주는 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노해 시인이 1984년 발표한 시집 <노동의 새벽>에는 ‘손무덤’이란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참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하략)”

‘손무덤’이 나온 지 35년이 지났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다국적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down·단속을 멈춰라)’의 리드 보컬이었던 네팔 출신 이주노동자 고(故) 미노드 목탄(미누)은 공연 때마다 빨간 목장갑을 꼈다. 이는 프레스기에 잘린 이주노동자의 손가락을 상징했다.

포천이주노동자상담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는 페이스북에 손가락이 잘린 이주노동자들의 사진을 올릴 때마다 이렇게 적는다. “내부 식민지.”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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