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예멘 난민, 혐오 대신 환대와 연대를!

 
 전쟁의 포화를 피해 500여 명의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로 들어왔다. 한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공포였고, 이는 인종차별과 자국민 중심주의와 맞물려 강력한 힘을 얻었다. 난민에 반대한다는 청원에 70만 이상이 찬성을 하고, 난민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리고, 전 법무부 장관이라는 자는 난민들에게 우리들의 딸을 빼앗길 수도 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한국은 무슬림에 대해서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테러리스트, 성범죄자로 낙인찍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 한국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IS와 같은 일부 극단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며, 우리는 그들의 폭력과 극단주의를 기꺼이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슬림이라서가 아니라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에 비판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이들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반이슬람 인종 차별의 화신인 유럽의 극우주의자들 역시 신랄하게 비판해야 한다. 서로의 증오를 먹고 커나가며, 민주주의·인권을 파괴하는 양자를 똑같이 비판해야 한다. 왜 아랍인만을 테러리스트로 상상하는가? 아랍이라 나쁘고, 유럽이라서 옳은것이 아니다. 왜 이주노동자 가정은 다문화 가정이고, 백인 이주 가정은 글로벌 가정인가? 유럽인이냐 중동인이냐, 백인이냐 유색인이냐, 기독교인이냐 무슬림이냐 같은 것들을 이유로 인간의 행동을 짐작하고, 인간의 가치(열등함/우열함)를 따질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하고 있고,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것이 바로 인종차별이다. 
 
▲무슬림 아닌 테러리스트를 비판하자
 
 ‘우리의 딸들’에 대한 걱정을 살펴보자. 전세계적으로 성범죄의 대부분은 무슬림이나 낯선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인에 의해서 발생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성적 폭력의 가해자는 난민들이 아니라 대다수 한국 남성(지인이 85%)이다. 또한 프랑스와 같은 제도적 성평등이 비교적 잘 정착된 소위 ‘선진’서구사회에서도 성범죄는 많이 일어난다. 각기 사회마다 폭력의 양상이 다르고 결이 다를지언정, 여성 폭력의 가해자는 종교 국적 여부와 관계없이 공히 존재한다.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국민에게 위험이 될지 모르는 자들을 색출해내자는 것일 뿐이라고 외친다. 반복하자면, 특정 인종이나 종교를 이유로 하는 ‘색출’이 인종차별이다. 생각해보면, 2015년 터키 해변가에서 시리아 난민 소년 쿠르디의 작은 시체를 목도했을 때나, 구호단체의 광고를 볼때 한국인은 기꺼이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난민을 직접 마주한 후의 반응은 아주 달랐다. 아마 예멘난민 대다수가 젊은 남성들(난민 중에는 젊은 남성이 많다. 징집·죽음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는 경우가 많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먼저 타국에 자리를 잡으려하기 때문이다. 4·3항쟁이나,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난민들 중에도 같은 이유로 남성이 숫적으로 많았다)이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상상속’ 난민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동정은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거나 약하다는 전제하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나보다 못하지 않거나, 조금이라도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180도로 표정을 바꿀 수 있는 감정이다. 그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보통의 인간일뿐이다. 미래를 희망하고, 삶을 이어나가려는 보통의 인간일 뿐이다. 난민은 위험하다거나, 불쌍하다거나 어느쪽으로건 편견에 근거해 섣불리 재단하지 말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상황을 이해해야한다. 
 
▲ 자국인과 난민, 누가 더 불행한가? 경쟁이라니 탚 
 
 지금 예멘에서는 정부군, 시아파 반군, 남예맨 분리주의파,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복잡하게 격돌하고 있다. 게다가 수니파의 수장격인 사우디가 ‘합법적 정부 보호’를 명목으로 아랍연합군과 함께 정부군의 뒤에 서있고, 시아파 반군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 여기에 다시 사우디 뒤에는 미국과 영국 등이, 이란 뒤에는 러시아가 지정학적 다툼과 무기 판매에 열을 올리면서, 예멘내전은 대리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쟁이 한편에서는 누군가의 집과 목숨을 앗아가고 한편에서는 누군가에게는 이득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양차 대전 전후로 확립된 미국 헤게모니 세계 체제 하에서 자본의 세계화는 미국, 유럽, 동아시아 등 몇 개의 특정 지역에 한정해 편향적으로 발전해 왔다. 버려진 세계(아랍, 아프리카 등)의 낙후와 분쟁 상황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혼란 속에서 이득을 얻는 특정국가(서방세계)들 사이의 역학관계 그리고 이윤추구를 원동력으로 삼는 자본에 의한 지정학적 게임 사이의 역동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일자리 부족이나 삶의 팍팍함의 원인은 난민이 아니다. 국가간, 그리고 ‘자국민’ 내에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자본주의 세계화가 원인이다. 유럽의 무능한 엘리트층은 (지금 한국이 하려는 것처럼) 자신들을 향한 경제위기와 양극화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난민에게 돌렸다. 이는 당장은 손쉬운 해결책이었을지 모르나, 포퓰리즘 정치세력과 극우 파시즘의 확산을 낳았고, 이것이 다시 난민과 이주민들을 둘러싼 문제들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2001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테러 중 난민에 의한 것은 한 건도 없다. 이 테러들은 실패한 이주정책으로 인해 사회에서 소외된 이주민 2·3세에 의해 일어나거나, 반이슬람 극우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유럽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 

 인종차별에 근거한 난민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지금 바로 멈춰야한다. 자국민과 난민 사이의 ‘누가 더 불행한가’ 경쟁 붙이기는, 없는 자들끼리하는 바닥을 향한 경주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을 가리고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난민을 환대하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만이 희망이자 돌파구이다.
현백 <광주드림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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