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4-08-13 17:45]

막 내리는 '불법노동자' 시대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17일 실시된다. 1992년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 제도에서 출발한 외국인 노동자시대가 ‘불법’에서 ‘합법의 시대’로 바뀌는 이정표다. 산업현장에는 마지막 집중 단속에 쫓기는 불법 노동자들의 울음소리, 떠나는 불법 체류자들의 추억담, 일손을 잃게 된 영세업체의 한숨이 가득하다. 그 현장을 찾아갔다.

출입국관리사무소 단속 현장 동행취재

11일 오후 3시 경기도 광주시. 산골짜기에 있는 C실업 공장 옆 땡볕에 달궈진 컨테이너 박스를 열자 1평 남짓한 방에서 후끈한 열기가 확 솟아오른다. 단속반원들이 숨막히는 열기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후다닥 여자 한 명이 산으로 달렸다. “잡아!” 여자가 높이 4m 절벽 아래로 데굴데굴 굴렀다. 추격전은 싱겁게 끝났다. 엘레노어(48). 이 필리핀 여인은 절벽 아래에서 “1년만 더 일하게 해주세요” 하며 다친 팔을 매만졌다.

“숨겨둔 내돈 갖고 가게 해줘요”

엘레노어와 함께 붙잡힌 몽골인 토야(여·32). 엘레노어와 달리 시종 여유를 부렸다. “남편, 딸이 보고 싶어. 빨리 보내줘요. 내일쯤 갈 수 없나요. 안그래도 가려고 했어요.” 단속원들은 “저 여자 99년에 들어와서 돈도 벌고, 나가려던 참에 붙잡혀 별 걱정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흰색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온 사장은 이 모습을 지켜보면서 담배만 뻑뻑 피웠다.

앞서 오후 1시45분 대로변에 위치한 H목재.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도네시아인 5명이 붙잡혀 쇠파이프 2개로 창문을 막은 승합차에 실렸다. 이 공장을 단속한 것은 “불법 체류자 때문에 불안해서 애들을 밖에 못 내보내겠다”는 주민 신고 때문. 인도네시아인 수티넴(여·31)이 “돈 가져가야 돼. 땅바닥 밑에 돈 숨겨놨어요”라며 소리쳤다. “가만히 있어”란 단속원들 말에도 양손을 수갑 찬 것처럼 딱 붙이고, “이거(수갑) 해도 돼요. 안 무서워요. 방에 갔다오게 해줘요”라며 하소연했다. 단속원 1명이 동행해 지갑을 가지고 왔다. “한번 잡혀가면 다시 못 와요. 짐은 고용주가 싸서 가져다주니까 숨겨둔 돈을 걱정할 수밖에요.” 단속원 말이다.


“괜찮아, 곧 데리러 갈게”

승합차가 떠나려 할 때 공장 옆 순댓국집 주인이 나와 이들 5명과 한 명씩 악수했다. “정 많이 들었는데…잘 가요” “잘 있어요, 아저씨. 미안해요.” 그들이 이 땅에 와서 한 일이 미안해야 할 짓이었나?

전날인 10일 오후 2시 경기도 평택시. A전기 생산과장이 뛰쳐나왔다. “너 ×발, 너 불법 아니라고 했잖아. 왜 거짓말해 이 새꺄!” 하며 한 여자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렸다. 중국인 노동자 주리샹(35)은 겁에 질려 울먹이며 “여보, 여보”를 연발했다. 남편을 불러달라는 뜻이었다. 남편은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결혼해 들어온 주씨는 합법체류자이지만 취업 허가를 받지 않았다. 불려온 남편이 아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마, 괜찮아, 곧 데리러 갈게.” 붙잡힌 중국인 노동자는 3명. 확인 결과 불법 체류자는 아니었지만 정부에 신고된 업체와 일하는 업체가 달랐다. “원래 채용 회사가 불법 알선업체인 것 같아요. 이들을 다른 회사에 빌려주고 임금 10%를 수수료로 떼지요. 빌려쓴 업체는 보험을 안 들어줘도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외국인 노동자만 착취당하지요.”(단속반원)

같은 날 오후 1시15분 도금업체 B사. 단속반원이 공장 내부로 들이닥쳤다. 마스크를 쓰고 일하던 노동자들의 얼굴을 한 명씩 확인했다. 외국인 티가 나면 신분증을 요구하고, 한국인과 비슷하면 말을 걸었다. 한 노동자가 “한국 사람” 하고 말하자 “본적은?” 하고 물었다. “수원시 팔달구요.” 불쾌하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였다. ‘통과’. 다음 노동자도 “한국 사람” 하고 말했으나 영락없는 ‘조선족 말투’였다. ‘승합차행(行)’.



선글라스 낀 백인 노동자도

오후 3시 송탄공단 부근 거리. 선글라스를 끼고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백인 남성이 지나갔다. 마치 휴가나온 미군 같았지만 단속반원은 “이상하다”며 승합차를 세웠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자 냅다 뛰기 시작한다. 곧 붙잡힌 그는 “인 마이 홈, 마이 홈!”(신분증이 집에 있다는 뜻)이라고 외친다. 차에 태워 영어로 이름을 묻자 ‘Vethesvlav Kartashon’이라고 썼다. 붙잡혀 있던 키르기스스탄 불법 체류자 아지즈(21)가 통역을 했다. 러시아인, 7월 25일까지 출국했어야 하는 불법 체류자다. 단속반원은 “희멀건한 백인들 중에도 불법이 많다”고 말했다.

승합차가 신호에 걸렸다. 오토바이를 탄 외국인 한 명이 옆에 섰다. 불법 체류자를 연상케 하는 행색이다. 단속원이 “잡을까요” 하자, 상관이 “냅둬라, 차에 앉힐 자리도 없다”고 답했다. “자식, 운 좋다~.” 단속원이 창 밖 외국인에게 미소를 던지자 그도 빙그레 눈웃음을 쳤다.


(광주·평택=임민혁기자 lmhcool@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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