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260_10151084577023302_230602286_n.jpg 이주민과 이주노동자가 중심에서 운영되는 이주노동운동, 이주민센터, 이주선교

장창원목사 (후원회공동대표)

 

지난달 서울역에서 천여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였다. 집회의 내용은 법무부가 이주노동자의 작업장 이전할 때 그동안 하던 방법의 서면, 안내를 하지 않고 노동부가 제시한 사용자에게 전화 연락을 하여 채용을 한다는 시행령에 반대하는 집회였다. 올해 81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법령에 대한 강한 거부와 이주노동자를 중심에 두지 않는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였다. 일명 이주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다는 집회다.

 

집회가 진행되면서 참가 발언자들은 특유한 이주노동자들의 언어로 연설하며 항의하고, 소리치고, 화를 내었고, 노래와 춤으로 그리고 연극을 하면서 자기주장을 하였다. 이날 참가한 한국인들은 소수였고 이주노동자가 전국에서 모였다. 마무리하는 율동과 노래를 남녀 사회자가 번갈아서 허는 것으로 감동을 더하며 서울역의 이주노동자의 집회는 마무리가 되었다. 명동까지 거리행진도 무리 없이 진행하였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기쁘고 놀라고 즐거운 마음과 감동으로 흥겹게 참가하였다.

 

한국사회는 최근 이주노동자와 이주결혼여성의 문제가 새로운 과제이며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속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노동자가 사회와 국가 속에 자주적인 권리와 평등한 의무, 사회적 결정권이 있다면 당연하게 이주민들도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선진 이주민사회의 경험이 있는 국가들이 격어 온 시행착오를 넘어서야 한다.

 

나는 지금 캄보디아에 몇 일간 방문을 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민으로 살고 있다. 건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들이 있다. 새로운 국가 간의 교류관계 협정으로 정부는 최근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떠날 때 1년 노동의 계약을 하고 다시 1년 후 보다 좋은 조건의 일터를 생각했는데, 정작 한국정부의 시행법령의 변화는 처음과 다르게 운영되어서 일자리로 이전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3년으로 계약이 변경되었다. 지난 5월부터 이주노동자의 집회에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많은 수의 집회참가자는 자발적으로 자기의 피해와 억울한 상황을 주장하려는 캄보디아 노동자가 많았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 2004년 처음 건설이 되었을 때 명동성당에서 고용허가제를 반대하는 농성을 한 결과였다. 이주노동자들이 주측이 되는 노동운동과 활동이 시작되었다. 자기의 권리를 자기가 찾으려는 이주노동자들은 1년간 계속 천막농성을 하며 민주노총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조합을 건설하였다. 이제 이주노동조합의 건설 10여년이 되는데 아직도 대법원은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며 이주노동조합을 인정하는 판결을 미루고 있다.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였으니 당당한 권리를 갖고 노동조합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정부의 이주민 정책을 보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자기관리를 찾기 위한 활동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더욱 협력하고 지원을 해야 한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가 중심에서 운영되는 이주노동운동, 이주민센터, 이주선교, 이주법안이 꼭 필요하다.

20121031일 캄보디아 푸놈펜에서

 

 

 

 

 

 

나는 1990년대 초반 영등포산업선교회를 통하여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0여년의 경험으로 1998년의 이후 IMF경제대란과 노동운동의 탄압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과 교육, 투쟁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와 사회변혁의 꿈을 가졌다. 당시 교회는 실업극복과 노숙자에 치중한후견기관을 자처하였다.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감당해야한다는 사회의 현상과 흐름에 동떨어진 연대를 주장을 하던 나는 산업선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마침 3년 전부터 세계개혁교회연맹에서 아프리카의 르완다 종족갈등과 학살의 복구과정에 산업선교가 필요하다는 요구에 순응하여 일환으로 민중교회의 선교사를 찾고 있었기에 나는 큰 걱정없이 아프리카로 따났다.

 

2003년 오산노동자문화센터를 개소하였고 지역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듣는 입장에서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시작하게 되었다.

 

아시아태평양연대(APWSL)1981년 출발하였다고 한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나는 국제회의가 연속이 되어서 해외출장을 몇 차례나 다녀왔다.

나는 멀고도 험한 국제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매일 비행기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비싼 티겟 값과 소중한 시간이동을 생각하며 목슴을 걸고 탄다. 소정의 일정을 마치면 뒷풀이 여행을 하는 습관이 있다. 내가 만난사람들, 내가 회의하고 결정한 내용들, 어떠한 문화와 역사속에서 이루어 졌는가를 둘러보고 싶다. 여행하는 지역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문화와 역사를 돌아보고 아름다움을 찾아서 만끽하기위하여 조금은 여유롭게 여행하는 습관이 있다.

 

지난 3월에 ILPS 중앙위원회가 열린 네덜란드 울트락회의를 마친 후 독일의 광부, 간호사로 한국에서 이주 노동한 가정방문, 스페인으로 유학하는 동지방문, 스웨덴의 평화통일운동가 선배방문, 노루웨이의 3대 아프리카 선교사 친구가정 방문. 6월에는 한국교회의 선교여행으로 중국의 단둥, 백두산, 심양 조선족 이주노동자 지역. 7월에 홍콩에서 열린 이주노동자 인권과 권리에 관한 회의 9월에 한국과 일본의 결혼이주여성들이 교류방문 프로그램으로 도쿄, 도요타자동차노동조합의 도시 나고야, APWSL 오사카, AWC 쿄토방문 10월의 아시아, 세계교회 인권교육과 훈련프로그램으로 태국방문 캄보디아교회방문을 하고 있고 11월에는 필리핀 마닐라에 이주노동자세계포럼이 일정으로 잡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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