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정책에 차별받는 한국女·이주男 부부

정주영씨 "네 남편 나라로 가라는 것 같아"

인권운동가로 활동…"정책의 외연 넓힐 때"

한국인 유일, 5기 이화여대 프로그램 참여

정주영씨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LG컨벤션홀에서 이야기하고있다. (이화여대 제공)© News1


(서울=뉴스1) 박응진 기자 = "한국사회는 저같은 사람에게 '너 왜 여기 있니? 어서 너의 남편 나라로 가라'고 하는 것 같아요."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결혼해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정주영(45)씨는 지난 16일 뉴스1과 만나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이키며 정부와 지자체가 추진 중인 다문화정책의 편향성을 지적했다.


정씨는 지난 2004년 대구가톨릭 노동자 센터 한국어교실에서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를 했다.


그는 이곳에서 남편 기난자르 라흐마(43)씨와 처음으로 사제지간의 연을 맺어 1년 동안 교제한 뒤 이듬해 결혼했다.


하지만 한국 여성이 외국인 남성과 결혼해 국내에서 살아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남편이 개발도상국 출신이라는 점은 그에게 상상 이상의 고통을 안겨줬다.


정씨는 "사람들은 우리를 부부로 보지 않고 사귀는 사이이거나 내가 남편에게 자원봉사를 하는 관계로 본다"며 "남편에게 반말하는 사람들에게 따지면 '남편인 줄 몰랐다'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고 말했다.


남편과 성별이 바뀌는 황당한 경험도 했다. 다문화가정 실태조사차 지자체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신이 정주영이라고 밝히자 수화기 너머로 화들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인이 당연히 남자인 줄 알고 성별을 바꿔 서류를 작성해놨던 것이다.


정씨는 주변 편견 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자체의 다문화 정책과 지원으로부터도 차별 대상이다. 친정 보내주기, 친정 부모 초청하기, 김치 담그기 수업 등 대부분 프로그램의 초점이 결혼 이주여성에 맞춰져 있다.


정씨는 "요즘 지자체나 민간단체가 진행하는 다문화가정 행사에서는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연락도 안 오고 가도 할 수 있는 게 없어 소외되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가장 아쉽고 급한 건 방문 한국어교실"이라며 "결혼 이주여성의 경우 1년 동안 무료로 일주일에 두 번, 4시간의 한국어 수업을 받는데 결혼 이주남성들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한국어 습득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센터에서 진행되는 수업은 전부 평일 근무시간에 진행돼 일을 하고 있는 결혼 이주남성들은 이조차 참여할 수 없다. 정씨는 결국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남편에게 개인과외 선생님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정주영씨가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LG컨벤션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화여대 제공)© News1


정씨처럼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가족들은 스스로 모임을 만들어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씨는 '파키스탄 커플 모임'에 소속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고 육아와 시댁 관리 문제 등을 상담한다.


그는 "외국인들이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 10년이 지났고 한국 여성과 외국인 남성 부부의 비율도 전체 다문화 가족 중 18%을 차지하는 만큼 다문화정책의 외연을 넓힐 때"라고 강조했다.


정씨가 '초국적 아시아 여성네트워크'(TAW Network)에 참여하게 된 계기도 이같은 차별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동남아시아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 이주 여성노동자 등 25명이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TV 등에서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모니터하고 편견과 인종주의적인 요소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다. 이주민 관련법 개정 운동과 인권교육, 남편 국가에 장학금 보내기 등도 하고 있다.


정씨는 특히 이 단체 교육팀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와 경북지역의 초·중·고교에 강연을 나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인권 감수성을 길러주고 있다.


정씨의 이같은 노력으로 5기 이화글로벌임파워먼트 프로그램(EGEP)의 유일한 한국인 참가자가 됐다. EGEP는 이화여대가 세계 여성 인권운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한 단기 집중 교육 프로그램이다.


정씨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LG컨벤션홀에 모인 세계 각국 여성 인권운동가들을 대상으로 주제발표에 나섰다.


그는 "외국인 남성과 결혼하는 한국인 여성은 소수인데 이들은 또다른 불평등을 겪고 있다"며 "한국사회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해 청중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그러면서 프로그램에 참가한 외국 인권운동가들에게 여성 교육에 헌신하다 숨진 인도네시아 '국모' 카르티니에 대한 유인물을 나눠주며 초국적 여성 인권운동에 대한 비전을 공유했다.


정씨는 "세상을 전부 바꿀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다"며 "정부나 지자체의 다문화정책과 지원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동료들과 연대한다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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