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인종차별은 없다?…처벌규정·통계도 없는 외국인 혐오범죄

혐오범죄 관한 법률 부재…처벌규정도 없어
UN인권이사회,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권고
경찰·검찰 통계에 피해자 국적 '부재'

등록: 2016-07-18 10:50  수정: 2016-07-1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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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저항하라
지난 3월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 맞이 제 이주 인권 노동 사회단체 국제연대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종인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16.03.21 양지웅 기자 yangdoo@focus.kr

(서울=포커스뉴스)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지난 10일 오후 경기도 양주역 역사 안에서 한 중년남성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길을 가다 부딪힌 미얀마 출신 노동자가 "뭐야"라고 반말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중년남성은 수차례 미얀마 남성을 밀치고 뺨을 후려쳤다. 역무원과 주변인들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중년남성의 폭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에서 피를 흘리는 미얀마 청년을 몰고 다니며 "무릎 꿇어"를 연신 외쳤다. 한국말이 서툰 미얀마 청년은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일행 중 한 명이 폭행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고, 영상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즉각 "외국인 노동자는 무차별적으로 저렇게 폭행해도 되나", "젊은 한국인 남자였어도 저렇게 때렸을까 싶다. 사람이 살면서 부딪히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사과 안 한 걸로 저렇게까지 때릴 수 있는지"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경기도 의정부시의 한 이주민 인권센터에서 근무하는 활동가 A씨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미얀마 남성처럼 동남아 출신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그렇게 폭행했을까 의문이 든다"면서 "미등록 체류자라서 더 쉽게 폭행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회는 학습과 미디어를 통해 이주민 노동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이주민 노동자라는 이유로 일상에서 차별을 겪는 이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최근 한국인 남성이 미얀마 청년을 마구잡이로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주 외국인 200만명 시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노동하는 이들이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증오범죄의 실태 및 대책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대상 외국인 665명 중 폭행을 경험한 사람은 1.1%(7명), 말이나 행동으로 폭행의 위협을 당한 사람은 2.4%(16명)를 차지했다. 같은 시기 한국인은 0.4%만이 폭행 상해 등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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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경기도 양주역 역사 안에서 중년 남성이 미얀마 남성 2명의 뺨 등을 수차례 때리고 밀치는 일이 벌어졌다. <사진출처=페이스북 동영상 갈무리>

◆ 한국에 '공식적'으로 없는 인종차별…유엔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한국에는 엄연히 인종차별이나 외국인 혐오범죄가 없다. 법률에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완 아시아인권문화연대활동가는 "정부가 인종차별을 규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는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이 없다"면서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정의돼 있지 않아 인종차별 처벌 규정도 당연히 만들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차별은 인종 차별뿐 아니라 성차별, 나이에 따른 차별 등 복합적으로 일어난다"면서 "차별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015년 4월 유엔(UN) 인권이사회 특별보고관은 '대한민국 방문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 '인종차별'에 관한 법적 정의가 없는 점과 인종적 동기를 가진 범죄를 금지하거나 처벌할 특정 입법적 조치가 존재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또 보고서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포괄적 법이나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다른 포괄적 법의 최종 승인과 채택을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다수 유럽국가에서는 사회 모든 영역에서 차별금지를 명시한 차별금지법을 시행 중이다. 2000년대 들어 영국과 독일은 각각 '평등법'과 '일반적 평등대우법'을 제정했다. 앞서 1993년 뉴질랜드가 '인권법'을, 2004년 아일랜드가 '평등법'을 마련했다.

미국 일부 주는 '혐오범죄방지법'을 통해 혐오 동기로 인한 폭행과 살인에 더 무거운 형량을 내린다.

한국에서도 지난 17대 국회에서부터 차별금지법 제정 시도가 있었지만 보수단체들이 동성애 문제 등을 제기해 번번이 좌절됐다. 19대 국회에선 포괄적 차별금지법안 3개가 입법 추진됐지만 일부는 철회되고 나머지는 19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됐다.

대검찰청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대검찰청. 2015.08.17 오장환 기자 ohzzang@focus.kr

◆ 검·경 통계…범죄자 국적 '기재'·피해자 국적 '부재'

더 큰 문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한 정확한 집계조차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서울지방경찰청과 대검찰청은 매년 범죄 발생 및 검거추세 등을 정리한 '경찰범죄통계'와 '범죄분석'을 각각 발간한다. 이때 범죄자의 국적은 집계되지만 피해자의 국적은 조사되지 않는다. 피해자는 성별과 연령, 범죄자와의 관계만 조사된다.

이에 대해 경찰청 수사기획과 관계자는 "외국인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진 것은 최근의 일"이라면서 "시의적절하게 모든 통계를 다 조사하면 좋겠지만 예전에는 외국인 피해자 정보에 대한 중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조사를 안 했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 정책기획과 관계자 역시 "범죄분석 원표 기준이 최초로 만들어졌던 1969년 당시 피해자 국적 부분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면서 "지난 3년간 수사관이 범죄분석 원표에 피해자 국적을 표시하긴 했는데 이때 대표 피해자만 표시해서 통계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 통계로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아직 반영은 안 됐다"면서 "원표 90%를 경찰 수사관들이 입력하기 때문에 경찰측과 협의 중인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1990년 '증오범죄 통계법'이 제정한 이후 매해 의무적으로 증오범죄 통계를 작성해 관리한다. 이때 증오범죄는 인종·성별·종교·장애·성 정체성에 대한 편견으로 저지르는 범죄를 일컫는다.

'개인의 기본권 보호'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차별과 범죄에 관한 통계치는 찾아볼 수 없다.

인권위 조사총괄과 관계자는 "국내에는 '인종차별'이나 '인종혐오' 범죄에 관한 법률이 없다"면서 "그러다 보니 인권위 내 차별조사과에서 인종차별이나 인종혐오와 관련된 진정 들어와도 조사돼서 권고 상황까지 가는 게 아니라 조사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하되거나 기각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다만 인권위는 매년 발간하는 '인권통계'를 통해 '출입국관리기관 인권침해 진정 접수 현황'을 공개하고 있었다. 출입국관리기관 인권침해 진정 접수자는 대부분 외국인이다.

이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욕설·반말 6건, 폭행·가혹 행위 13건, 출입국 제한 12건 등 총 67건으로 지난해(총 18건)보다 3배 이상 많았다. 2011년엔 40건, 2012년엔 27건, 2013년엔 23건 등이었다.

 

이주여성의 인권은
지난 3월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 맞이 제 이주 인권 노동 사회단체 국제연대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베트남 이주여성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16.03.21 양지웅 기자 yangdoo@focus.kr

 

멈춰, 인종차별
지난 3월21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의 날 맞이 제 이주 인권 노동 사회단체 국제연대 공동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STOP RACISM'(인종차별 금지)가 적힌 현수막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03.21 양지웅 기자 yangdoo@focu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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