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제노포비아' vs '세계 이주민의 날'

지난해 12월 13일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서 열린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이주노동자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미국 온라인 영어사전 사이트인 딕셔너리닷컴(Dictionary.com)은 '올해의 단어'(World of the Year)로 '제노포비아'(xenophobia)를 선정했다. 제노포비아는 그리스어로 '낯선 사람'이란 의미의 '제노스'(xenos)와 '공포'를 뜻하는 '포비아'(phobia)를 합친 단어로, 외국인이나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혐오하는 것을 말한다. 1800년대 말에 영어 단어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딕셔너리닷컴은 올해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결정(브렉시트), 시리아 난민 위기, 미국의 대통령 선거, 미국의 비무장 흑인 총격 논란 등의 이슈가 터져 나오면서 이용자들이 '제노포비아'란 단어를 많이 찾아봤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의 인터넷·스마트폰 이용자들이 '제노포비아'를 가장 많이 찾아본 날은 영국 국민투표 이튿날인 6월 24일로 평소보다 검색량이 938% 폭증한 것으로 집계됐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당시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발언을 '제노포비아의 표본'이라고 비판한 이튿날인 6월 30일에도 검색 횟수가 치솟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반(反)다문화 현상이 종종 감지된다. 지난 9월 17일 제주도에서 한 중국인 남성이 성당에서 혼자 기도하는 60대 한국인 여성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자 중국인 관광객 전체를 대상으로 혐오감을 쏟아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식당에서 외국인이 보이는 추태나 이들이 한국인과 벌이는 말다툼 장면 등이 인터넷에 올라와 누리꾼들로부터 이른바 '댓글 테러'를 당하는 일도 있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와 사회 양극화 등으로 먹고살기가 팍팍해지자 이들에게 화살을 돌려 불만을 쏟아내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고 풀이한다. 실제로는 외국인 범죄율이 내국인보다 낮은데도 외국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선도 있고, '외국인이 일자리를 빼앗는다'거나 '복지·병역·조세 등에서 내국인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등의 편견도 깔려 있다.

외국인의 국내 이주나 다문화가정의 증가는 모든 선진국에 나타나는 세계적인 현상이자 시대적인 추세이다. 교통·통신의 발달, 국경의 장벽 완화, 나라 간 임금이나 소득 격차, 3D 업종 기피 현상, 출산율 저하 등이 그 원인으로 분석된다. 올 6월 말에는 국내 체류 외국인이 200만 명을 넘어서 전체 인구의 3.9%를 기록했다. 법무부는 2011∼2015년의 연평균 외국인 증가세(8%)를 고려할 때 2021년 국내 체류 외국인이 300만 명을 넘어서 인구의 5.82%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학계에서는 통상 외국인 주민의 비율이 5%를 넘으면 다문화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문화사회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 그에 따른 법과 제도나 국민의 인식은 부족하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다.

국제이주기구(IOM) 한국대표부와 서울시가 12일 서울광장에 설치한 이환권 작가의 남북한 부부와 다문화가족 3남매 조각상. [IOM 한국대표부 제공/연합뉴스 자료 사진]

18일은 '세계 이주민의 날'이다. 전 세계 10억 명에 이르는 이주자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2000년 유엔이 제정했다. 1990년 이날 유엔이 제45차 총회를 열어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을 채택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이 협약은 강제노동 금지, 국외 추방 제한, 주거 선택의 자유, 노조 설립 보장 등을 담았다. 특히 불법 체류나 불법 고용 등 부적법 상태에 있는 노동자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47개국이 비준했으나 우리나라는 아직 비준하지 않고 있다.

유엔 국제이주기구(IOM) 한국대표부는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서울시와 함께 12일부터 23일까지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당신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는 주제로 이주민 인식 제고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이 기간 서울광장에는 탈북 남성과 남한 여성 부부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환권 작가의 조각이 전시된다. 지난해 그가 선보인 가나 출신 다문화가정 3남매 조각상도 또다시 세워졌다. 1951년 출범한 IOM은 회원국이 165개국에 달하며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다. 한국은 1988년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고 1999년 한국대표부가 문을 열었다. IOM은 2009년 한국 정부와 협정을 맺어 IOM이민정책연구원도 설립했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8월 17일 서울 중구 삼일대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고용허가제 폐지 등을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경기이주공동대책위원회·민주노총·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주공동행동·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는 18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광장 해치마당에서 세계 이주민의 날 기념 이주노동자대회를 개최한다. 대구 2·28공원과 울산 북구청에서도 지역 단체 주관으로 동시에 열린다. 참가자들은 '이주민 200만 시대 모든 이주민에게 인권과 노동권을!'이란 주제 아래 ▲고용허가제 폐지 ▲이주노동자 사업장 이동 자유 보장 ▲퇴직금 국내 지급 ▲농어업 이주노동자 차별하는 근로기준법 63조 폐지 ▲초단기 계절 이주노동자 제도 도입 반대 ▲단속 추방 중단과 미등록이주민 합법화 ▲난민 인정 대폭 확대 ▲이주노동자협약 비준 ▲해외투자기업 연수생 제도 폐지 등을 촉구할 예정이다.

관계 당국은 이들의 요구를 당장에 모두 수용하는 것은 어렵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분야에 따라 부작용이 우려되는 대목도 있을 것이고, 국민적 공감대가 아직은 덜 이뤄져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듯싶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에 나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볼 필요는 있겠다. 불과 몇십 년 전 독일에서, 베트남에서, 중동에서 우리 근로자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제는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그럴 때가 됐다. 특히 이주노동자협약 비준은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라는 이름값이 언제까지나 공짜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주민보다 그들을 기피하는 시선(제노포비아)이 우리 사회를 오히려 위태롭게 만드는 그런 일도 없어야 한다.

hee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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