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인가, 가진 자의 조롱인가
샤를리 엡도 테러 논쟁 총정리

등록 : 2015.01.15 16:29 수정 : 2015.01.15 17:27

 

이슬람 예언자 무하마드가 '나는 샤를리다'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샤를리 에브도> 최신호가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뉴지움(Newseum)' 박물관 외부에 전시되어 있다. EPA/연합

[더(the) 친절한 기자들]
프랑스 주간지 테러가 촉발한 ‘표현의 자유’ 논쟁
총기 테러의 배경엔 서구·이슬람의 오랜 갈등이 내포
사건 초기 ‘이슬람 비판’에서 ‘이민자 소외’ 문제까지

언론사를 향한 전례없는 표적 테러였습니다. 심지어 한 경찰관이 테러범에게 사살당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까지 공개됐습니다. 충격은 고통이 되어 실시간으로 세계에 전송됐습니다. 테러를 범한 사이드 쿠아시와 세리프 쿠아시 형제가 범행 당시 이슬람의 신앙고백으로 ‘신은 위대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쳤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SNS의 초기 반응은 이슬람에 대한 비판으로 테러의 충격을 상쇄하려는 모양새였습니다.

프랑스의 풍자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총기 테러가 발생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실시간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뉴스를 본다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세월호 참사 때 했습니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는 최근 펴낸 <음모론의 시대>를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했습니다. 한국인들이 멀리 파리에서 벌어진 테러를 두고 논쟁을 벌인 것도 결국 고통스러운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설명하고 인식하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논쟁 가운데 일부를 ‘더(the) 친절한 기자들’이 정리해봤습니다.

논쟁의 첫 단추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실린 기사 두 꼭지였습니다. <한겨레> 정의길 기자는 9일치 3면 기사 ‘도 넘은 이슬람 비하인가, 보호해야 할 표현의 자유인가’( ▶관련 링크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72802.html )에서 이번 테러가 “1989년 살만 류슈디 사건 이후 계속되고 있는 서방과 이슬람권의 ‘가치 충돌’의 위험을 다시 일깨운 사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살만 류수디 사건이란, 인도계 영국 작가 류수디가 1988년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가 악마의 유혹을 받고 코란을 썼다는 내용이 담긴 <악마의 시>를 출간한 뒤 일본어 번역자가 살해당하고 이탈리아어 번역자가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기사는 앤드루 허시 교수의 <뉴욕 타임스> 기고문을 인용하며 “<샤를리 에브도>와 그 관계자들은 모든 권위주의에 반대했던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 세대의 유물”이라며 “파리 중심부에서는 권위의 콧대를 비트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이민자들이 사는) 변두리에서는 깊은 종교적 신념을 비롯해 변두리 사람들이 존중하는 것을 조롱하는 힘있는 자들의 오만으로 비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택광 “무장폭력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표현의 자유라도 권력 유무에 따라 달라”

같은 날 <경향신문> 1면에 실린 손제민 기자의 ‘극단(과격한 표현 자유)과 극단(호전적 근본주의) 사이…설 땅 잃은 화해’(▶관련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082207165&code=970205 )라는 제목의 기사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기사는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 허용될 수 있는지는 늘 논쟁거리였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지난 9년 사이 경제 상황은 더 나빠지고 극우정당이 세를 확장했다. 사회 전반의 ‘관용’도 쇠퇴했다”며 “분명한 건 표현의 자유와 극단주의의 대립 속에 공존과 관용을 내세우는 화해론자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두 기사는 이번 테러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구와 이슬람의 오랜 갈등에서 배태됐다는 점, 표현의 자유로 대표되는 서구의 세속주의 가치와 이슬람의 종교적 신념 혹은 근본주의가 오랜 기간 동안 대립해왔다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한겨레> 기사는 ‘문명의 충돌’ 외에도 프랑스 등 유럽의 국가 사회 내부에서 배제당하고 있는 이민자 커뮤니티의 내부적 소외 문제도 살짝 거론하고 있습니다.

두 기사가 제기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글이 1월10일치 <경향신문>에 실린 이택광 경희대 교수의 ‘표현의 자유라는 상식에 대한 도전’(▶관련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1092041515&code=990100 )이라는 칼럼입니다. 이 교수는 글에서 “모든 무장폭력은 문명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위이고 이런 의미에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비판받아야 한다”면서도 “내부적인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화는 이주노동자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공존은 이제 선택 사항이라기보다 필수 사항”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원칙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이들에게 허락되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다 같은 표현의 자유라고 해도 권력의 유무에 따라 결과는 각기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14일(현지 시간) 독일 쾰른에서 열린, 반이슬람주의 반이민 운동 조직 '쾨기다(KOEGIDA)'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가한 한 시민이 '인간 혐오는 의견이 아니다. 우리가 샤를리다. 자유와 다양성을 위하여'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EPA/연합
유럽의 서방 선진국에는 최근 20년 사이 아프리카나 중동, 동유럽이나 아시아에서 온 다양한 종교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이 이주해 사회의 한 축을 이루며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변두리에서 배제된 채 자기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뤄 해당 국가의 하층 노동을 담당합니다. 한국의 동남아 이주노동자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교수는 그래서, <샤를리 에브도>가 내세우는 표현의 자유는 프랑스 사회의 주류들만 누릴 수 있는 ‘세속주의적 관점’에 종속되고, 세속주의와 대립하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거나 되레 위협이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샤를리 에브도>가 인종차별주의적 풍자도 서슴지 않았다는 글도 나왔습니다. 저널리스트 제이콥 캔필드는 ‘샤를리 에브도 이후: 언론의 자유가 곧 비판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다’는 글(▶번역 글 블로그 링크 : http://transoftheweek.tumblr.com/post/107510318524 )에서 “그들(샤를리 에브도)은 자비롭게도 주장하기를 “모두를 평등하게 공격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이 싣는 카툰은 의도적으로 반이슬람적이고, 드물지 않게 성차별적, 호모포비아적”이라며 “<에브도>의 목적은 자극하는 것이고, 이들 카툰은 백인 편집진이 자극하고 싶어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에서 가장 주변화된, 그리고 종종 공격의 대상이 되는 무슬림 이민자 커뮤니티”라고 비판했습니다.

반론 “샤를리 에브도, 극우주의자들도 조롱…
순결한 피해자만 보호 받아야 하는가”

반론이 나왔습니다. ‘학자’라고 자신을 밝힌 이나라씨는 13일 <슬로우뉴스>에 기고한 ‘“나는 샤를리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관련 링크 : http://slownews.kr/36221 )에서 이택광 교수의 글을 두고 “테러리즘의 희생자 샤를리 에브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이들의 정치적 올바름을 입증해주는 것은 사실 불필요한 일”이라며 “마치 순결한 피해자만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듯한 도덕주의의 질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샤를리 에브도의 도덕성,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질문은 어쩌면 이들의 죽음을 야기한 야만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분노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씨는 이후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교나 무슬림을 주요한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모든 권위, 특히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인의 위선과 반민중성을 조롱했다”며 “특히 가장 빈번히 반외국인, 반이슬람 정책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극우 정당을 조롱했다”고 밝혔습니다.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교와 무함마드에 대해서만 조롱한 것이 아니고 되레 반이슬람 정책을 언급하는 극우 정당을 가장 빈번하게 조롱한 전형적인 반도덕주의 68혁명 세대의 주간지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택광 교수는 14일 재반론 글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표현의 자유 논란에 부쳐’라는 글(▶관련 링크 : http://wallflower.egloos.com/ )을 올려 “이 주간지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올리비에 시랑은 2013년에 이미 <샤를리 에브도>가 9·11 이후 의도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며 “분명한 것은 ‘프랑스적 풍자’와 그에 대한 오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이 또한 프랑스적인 맥락을 떠나면 인종주의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교수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표현의 자유는 암묵적으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한다. 한국의 경우에 이 문제는 더욱 적나라하게 진실을 드러낸다.”며 “<동아일보>는 이번 테러 문제를 다룬 사설에서 북한의 테러 위협을 강조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에 대해 호의적으로 발언했다는 이유로 신은미씨를 추방한 정부의 방침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표현의 자유는 거지와 부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거지와 부자라는 현실의 불평등을 교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 자체라기보다, 그 자유를 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11일(현지 시간)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행진을 위해 프랑스 파리의 나시옹광장에 모인 시민들. 이날 집회에는 100만명의 시민들과 40개국의 국가 지도자가 참석해 테러로 숨진 17명의 희생자를 추모했다. EPA/연합
한편, 표현의 자유, 세속주의와 종교주의의 갈등 문제보다 프랑스 내부의 시스템 문제에 눈길을 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프랑스 유학생’이라고 밝힌 김주원씨는 13일 <슬로우뉴스>에 ‘테러는 테러다: 프랑스 vs. 이슬람 관극틀의 문제점’이라는 글(▶관련 링크 : http://slownews.kr/36230)을 게재했습니다. 김씨는 “표현의 자유, 권위에 대한 도전, 톨레랑스, 라이시테 같은 가치들, 함께 모여 자유와 개성의 나라 프랑스의 이미지 같은 것을 이루고 있는 가치들이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를 통해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며 “그렇지만 희생자들이 희생된 것은 그들이 저 가치들을 위해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무고한 생명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씨는 이어 이번 테러가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의 테러’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테러를 일으킨 쿠아시 형제가 알제리계지만 ‘프랑스에서 자란 평범한 프랑스인’이라는 말입니다. 김씨는 “피자 배달 등을 하며 평범하게 절망한 청년으로 살다가 십여 년 전인 20대 초반에 또래 친구들의 이슬람 극단주의 모임에 빠져들었다”고 말합니다. 김씨는 이후 “프랑스 내에 이미 그들을 극단주의의 광기로 이끌 수 있는 시스템이 안착했다는 것, 나아가 그들의 무서운 성장을 프랑스 사회 주류의 담론과 치안 당국이 방치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합니다.

‘표현의 자유’ 뜨거운 논쟁 일어난 이유
“프랑스 이민자들의 계급적 소외 문제
90년대 아시아권 이주민 문제와 맞닿아”

성상민 만화평론가도 매체비평지 <미디어스>에 실은 ‘표현의 자유 수호와 테러에 대한 비판, 그 이상을 보기 위하여’라는 글(▶관련 링크 :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436)에서 “테러를 저지른 이들이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의 하위 계급이었던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라며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 프랑스는 20세기 중후반 노동력을 수급하기 위해 터키, 동유럽은 물론 알제리, 세네갈같이 옛날에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던 국가 출신의 사람들을 대거 이민자로 받아들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2005년 대규모 소요 사태는 프랑스의 이민자들이 프랑스에서 점점 사회적으로, 그리고 계급적으로 소외되고 있음을 드러냈다”며 “1990년대 아시아권 국가들에 사는 많은 이들을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주 노동자를 받아들인 이래 많은 이주민들이 한국에 정착을 한 지 오래인 한국 사회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노골적으로 이주민들에 대해 폭력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어떤 분들은 멀리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에 왜 이런 논쟁까지 해야하느냐는 말씀도 하십니다. 당면한 국내 문제부터 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도 하시지요. 하지만 마지막 성상민 평론가의 말처럼,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프랑스의 문제라기보단 국가 간 이주가 일반화하면서 민족과 종교, 계급의 간극에 따른 갈등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소외된 계층이 생기면서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폭력이 언제 어디서든 재발할 수 있는 세계적 문제라는 점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게다가 유럽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9·11테러 이후 급속도로 우경화한 미국 사회의 전철을 따를지 지켜보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관련 기사 : ’표현의 자유’ 외치더니…유럽, 앞다퉈 시민권 제한 추진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673471.html ) 세계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으니까요. 고통을 설명되면서 가라앉는 것이고, 갈등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데서부터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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