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아동]태어나자마자 ‘투명인간’ 서러운 미등록 이주아동

ㆍ출생등록 해주지 않아 탄생하는 순간 불법체류 상태 전락…
ㆍ2만명 넘는 아이들 보육서비스, 학생으로서의 권리, 건강보험 혜택 등 못 받고 인권사각지대 방치

파이(가명·12·남)는 얼마 전 복지단체의 지원으로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타고 텔레비전에서만 봤던 제주도를 간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설렘과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엄마는 파이에게 “너는 제주도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이는 제주도에 갈 수 없는 게 아니다.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 비행기를 타려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하는데 파이는 주민번호 열세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파이는 12년 전 한국에서 태어났다. 노동 비자를 받고 한국에 일하러 온 필리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였다. 아버지는 노동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계속 일하다 불법체류자로 잡혀 몇 해 전 필리핀으로 추방됐다. 파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지만 어머니도 현재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어머니는 불법이라는 신분이라도 있지만 파이는 공적으론 태어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이다.

일러스트·만화그리는 목각인형


파이는 12살이 된 지금까지도 출생등록이 돼 있지 않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고,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도 파이는 한국인이 아니다. ‘있지만 없는 아이.’ 이게 파이의 현실이다. 유령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이주아동들에게 출생등록은 교육권, 건강권, 행복추구권 등 다른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출발점”이라며 “출생등록을 할 수 없으면 본인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왜 나는 친구들처럼 주민등록이 없나요?”
요즘 반 친구들끼리 모이면 파이가 불법체류자라는 말을 종종 한다. 선생님은 파이를 다문화가정 학생이라고 소개했지만 친구들도 더 이상 믿지 않는 눈치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파이는 무섭고 죄를 지은 것 같다.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가 요즘 밤에 인형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많아졌다”며 “‘대한민국 사람인데, 왜 나는 주민등록이 없지?’라는 의문을 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령 아닌 유령으로 살아야 하는 건 파이만이 아니다. 18세 이하 미등록 이주아동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6000명이 넘는다. 법무부 통계에 의하면 2012년 10월 현재 불법체류자로 분류된 미등록 이주아동은 6095명이다. 여기에 통계로 잡히지 않는 미등록 아동을 포함하면 2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 불법체류자의 자녀, 난민신청자의 자녀 등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이주아동에 대한 출생등록제도가 없다. 또한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외국 노동자가 자녀를 낳았어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이에 따라 많은 이주아동들이 태어나자마자 불법체류 상태로 전락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4월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토론하고 있다. / 이자스민 의원실 제공


출생등록이 돼 있지 않으면 신분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다. 당연히 받아야 할 보육서비스, 학생으로서의 권리, 건강보험 등 각종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다. 여기에 교통카드 발급, 휴대폰 가입, 인터넷 등록, 은행 계좌 개설 등 실제로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을 본인 명의로는 개설할 수 없다.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이 있어요. 요즘은 학교 사이트에서 모든 과목을 다 가르쳐줘요. 동영상 강의도 볼 수 있고, 풀어볼 수 있는 문제도 있어요. 학교 사이트에서 공부를 자주 하는 친구들은 문화상품권을 타요. 그런데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학교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요. 아이디를 만들 수 없어서 다른 아이들이 하는 컴퓨터 게임도 못해요. 저도 주민등록번호 만들어주세요. 학교 사이트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싶어요.”(우즈베키스탄·초등학교 4년)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베키(가명)는 또래의 친구들처럼 학교 인터넷 사이트에 자기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이 꿈이다. 그러나 베키의 꿈이 실현되기에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다.

허용되는 건 초중고 입학과 예방접종뿐
정부는 우리나라를 인권 선진국으로 대외에 홍보하고 있지만, 미등록 이주아동의 생활실태를 보면 인권 선진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정부가 사실상 미등록 이주아동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90년 발효된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출생 후 즉시 등록돼야 하며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진다’(제7조 2항)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1년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비준·가입했다. 국제조약은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이에 따라 그동안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수차례에 거쳐 미등록 이주아동의 출생을 등록할 제도와 절차를 마련할 것을 권고해 왔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그나마 인권단체들의 요구로 이주아동에 초·중·고교 입학과 예방접종을 해주도록 허용해준 것이 전부다.

방청객들이 4월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지켜보고 있다. / 이자스민 의원실 제공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아동들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한 정치권의 움직임도 눈에 띄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 추진이다. 국회 인권포럼(대표 황우여 의원), 국회 다정다감포럼(대표 이자스민 의원) 등과 총 20개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이주아동권보장기본법’ 제정 추진 네트워크는 4월 3일 국회에서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가졌다.

이들은 공청회에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조만간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기본법이 제정되면 이주아동 출생등록의 길이 열린다. 이주아동에 대한 출생등록이 이뤄지면 지금까지 불안정했던 이들의 지위가 내국인 아동들과 비슷해진다.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불법체류하는 성인에 대해서는 엄격히 단속하고 있지만 아동에게는 다양한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와 같이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미등록 외국인이라도 자녀의 출생등록만큼은 허용하고 있다.

이주아동이 해당 동사무소에 출생등록을 할 수 있으면 한국 문화에 낯선 부모들도 아동들을 제때에 예방접종하고, 학교에도 보낼 수 있다. 이주아동이 취학연령이 되면 자동적으로 취학통지가 배달되고, 예방접종이 필요한 나이에는 예방접종 안내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잘 모르는 미등록 이주아동의 한 어머니는 황당한 경험을 했다. 주위에서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면 보증인이 필요하고, 그 보증인에게 200만원을 줘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 말을 믿고 200만원을 줬다가 그냥 떼였다. 몽골에서 온 이 어머니는 “한국어 학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학교에 들어가려면 거주하는 집에 대해 증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보증대가로 200만원을 요구해서 줬다”며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취학통지서를 보내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불법체류자 합법화 우려” 법 제정 꺼려
또한 미등록 이주아동들을 이대로 계속 방치하면 중학교·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어려운 학교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접어든 이주아동들은 자기가 불법체류자라는 것을 이때쯤에는 알게 되고, 불법체류자라는 친구들의 시선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 과정에서 친구들과의 잦은 싸움에 휘말릴 수 있다. 외톨이가 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지난해 10월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주아동 2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41.3%가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친구가 없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16.2%가 ‘(한국 학생들로부터)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이들이 범죄조직으로부터 인신매매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신분증이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이 없어져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고, 신고해도 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주아동 지원을 해온 살레시오수녀회 김효진 수녀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에게 주민번호는 아니더라도 관리번호는 줘서 정부가 관리해야 한다”며 “만약 관리번호조차 부여되지 않으면 인신매매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에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특히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불법체류자를 합법화시킬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이 법안 제정에 부정적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대부분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출입국관리법상 불법체류하고 있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며 “아동을 합법화시켜주면 출입국관리법과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이 충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에 재일동포에 대한 지문날인 철폐와 참정권 부여 등 인권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던 정부가 정작 우리나라 안에 있는 이주아동의 인권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 제정 추진 네트워크 김준기 공동대표는 “이주아동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인권국가라고 자청하는 우리 정부 위상의 문제”라며 “우리나라도 불법체류자는 단속하되 아동은 보호하는 이원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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