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부른 외국인노동자 ‘벌집 기숙사’
2013-02-26 오전 11:39:49 게재

60%가 컨테이너·비닐하우스·공장 등에서 생활 … 정부는 실태파악조차 안해

지난 20일 새벽 1시쯤. 충남 아산시의 한 자동차부품 업체에 근무하는 외국인노동자 S(35)씨는 잠을 설쳤다. 1달 전부터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다른 외국인노동자 L(36)씨가 옆 칸에서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고 있었던 것.

가건물로 지어진 회사 숙소는 방 하나에 4명이 지내도록 칸막이를 3개 세워 구분했다. 방음이 전혀 안되는 구조다. 조명은 천정에 달린 전등 하나뿐이었다. 회사는 매달 관리비·전기세 명목으로 6~7만원씩 월급에서 원천징수 했지만 그는 숙소를 옮길 여력이 없어 참고 지냈다.

S씨는 L씨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국적이 달라 말이 안 통했다. 참다못한 S씨가 불을 끄자 L씨도 화가 나서 불을 다시 켰다. 실랑이가 패싸움으로 번졌다. 근무피로, 열악한 숙소, 그리고 말 안 통하는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가 폭발한 S씨는 결국 싱크대에 있던 칼을 빼들어 L씨를 찔렀다.

7개월 남짓 회사에서 번 돈을 캄보디아로 꼬박꼬박 부치던 S씨는 이 일로 살인범이 됐다. L씨는 집 떠난 지 1년여 만에 차디찬 주검이 돼 네팔의 딸들에게 돌아갔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외국인노동자 A씨는 "근무 후에 편히 쉬고 싶지만 숙소마저 비위생적이고 불편해 스트레스가 계속 쌓인다"며 "이번 사건으로 외국인들은 밤마다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비위생" "외국인동거 불편" 호소 = 외국인노동자들의 열악한 주거환경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관련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실태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어 주거 스트레스로 인한 외국인노동자간 폭력·살인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2009년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외국인노동자 5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외국인노동자 60% 이상은 업체가 임의로 만든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중 컨테이너, 비닐하우스 등의 가건물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25%, 공장에 있는 방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37%에 달했다.

주거환경이 불만스럽다는 응답은 25%로 '만족한다(20%)'보다 많았다. 그 이유로는 '좁다'(23.8%)' '비위생적(14.3%)' '냉난방문제(19.7%)' '채광·통풍문제(10.8%)' 등이 고르게 제기됐다. '관리비가 비싸다'(8.7%) '외국인과의 동거가 불편하다'(15%)는 답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개별 응답 역시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다 △부엌이 없다 △화장실이 없다 △지하여서 비가 오면 잠긴다 △가구와 텔레비전이 없다 △한 방에 9명이 생활한다 △항상 시끄럽다 △정신적으로 힘들다 등으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상태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두 나라 사람 같이 살아서' '다른 나라 사람 같이 산다' 등 외국인과의 동거로 인한 불편을 불만족의 이유로 꼽는 경우가 많았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사장은 신경을 안 쓴다' 등 사업주의 무관심으로 인한 문제 역시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거비의 일부나 전부를 본인이 부담한다는 응답도 40%에 달했다.

◆정부, 영세사업장 숙소에 뒷짐 = 주거가 열악한 외국인노동자가 상당수지만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해마다 2회 사업장 기숙사 실태를 조사한다. 그러나 기숙사 건물을 정식으로 짓고 등록한 업체에 한해서다. 가건물이나 공장 안의 방을 임의로 쓰고 있는 영세사업장은 대상이 아니다. 전체 사업장의 89%에 달하는 30인 미만 업체의 숙소가 사각지대인 셈이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영세사업장 숙소에 대한 실태점검을 실시한 적은 없고 추진중인 대책도 없는 상태"라며 "현재는 국가가 이를 감독·지원할 근거가 없어 업체들이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20일 사건 이후 해당 업체의 외국인노동자들은 잇달아 인근의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를 찾아 이직문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센터에 따르면 상담을 받으러 온 외국인노동자들은 '언제 이런 일이 또 벌어질지 몰라 잠을 못 이룬다' '소음 때문에 못 견디겠다' '살기가 불편하다'는 등 불편과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삼열 소장은 "회사는 법적으로 책임이 없다지만 그것은 관련 제도가 미흡하기 때문"이라며 "기업과 정부가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지 않으면 같은 비극이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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