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소수자' 이주민 활동가, 데니 게라

"부산이 두 번째 고향이주 노동자 '도우미' 자청

 

2013-02-23 [08:10:21] | 수정시간: 2013-02-23 [10:34:50] | 12

 

이주 노동자에서 이주민 활동가로 변신한 데니 게라(사진 가운데) . 고국을 떠나 만 182개월째 한국살이를 하고 있지만 한국인 아내와 함께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7일 열린 '평등을 위한 이주민연대(SEMIK)' 월례회의에 참석한 데니 씨 모습.

 

일상생활을 하면서 접하는 ', 100'이라는 숫자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백발백중, 백년해로 같은 단어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백은 수 이상이고 셈 이상의 그것이다.

 

부산일보 와이드 심층인터뷰 '+(+)'이 오늘로 100번째를 맞았다.

 

100회 인터뷰 주인공으로 누구를 내세울까 적잖은 고민을 했다.

 

필리핀 대학 졸업 후 일자리 찾아

1994년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행

 

당시 하루 18시간 근무 월급 32만 원

브로커비·항공료 갚으면 '허덕'

 

외국인 근로자 지원 '부산BFC'

타갈로그어·영어권 상담 맡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소수자 중에서도 이주 노동자를 떠올렸다. 취업과 결혼, 유학 등을 위해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141만 명(행정안전부 2012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 조사). 이 중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이주 노동자는 588944(42%)으로 가장 많다. 부산만 해도 외국인 49329명 중에서 16460(33.4%)이 이주 노동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현재의 정부 다문화정책은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가족 자녀와 관련된 게 대부분이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은 사실상 실종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이가 데니 게라(43·본명 다닐로 라모스 게라 Danilo Ramos Guerra) 씨다.

 

그는 왜 한국에 왔고, 그동안 한국살이는 어땠으며, 이주 남성활동가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니 씨는 지난 1994년 산업 연수생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후, 2007년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현재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이하 부산BFC)에서 타갈로그어 및 영어권 상담을 하고 있는 이주민 활동가이다. 지난해 1010일 사상구 모라동에 문을 연 부산BFC는 부산은행이 공간을 제공하고, 부산시가 민간위탁(사단법인 이주민과 함께)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상담 활동을 하고 있는 데니 게라 씨.

 

-일요일인 데도 센터에 나오셔야 하나 봐요.

 

"여길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주 노동자들인데, 일요일이라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잖아요."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된 거죠?

 

"일자리 때문이죠!"

 

 

 

필리핀 바탕가스 주 로사리오 출신인 데니 씨는 수도 마닐라에 위치한 이스트 대학교 경영학과(5년제)를 졸업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독재 정권을 거치는 동안 거의 망가지다시피한 필리핀 경제는 데니 씨 같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떠돌게 만들었다. 6형제 중 넷째였던 데니 씨 역시, 망고 농장을 하시던 아버지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돈을 빨리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졸업 이듬해인 19941224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 땅을 처음 밟던 날, 기억나세요?

 

"크리스마스 이브였는데 눈이 내렸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보았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요."

 

-한국어 소통이나 적응은요?

 

"장림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어요. 용접을 조금 배워 오긴 했지만 전혀 모르는 분야라 힘들었죠. 한국말도 못했어요. 회장님이 사우디 이주 노동자 경험이 있어 겨우 의사소통을 했어요."

 

-그 회사에선 얼마나 일하셨죠?

 

"1년 있었어요. 당시 그 회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약 연장이 안 돼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할 신세였어요. 하지만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옛날 산업연수생들은 한국에 오기 전 필리핀 현지에서 브로커비를 내야 했어요. 3~3500달러. 당시로선 큰돈이었지요. 항공료도 본인 부담이었고요. 돈이 없다 보니 빌려서 냈어요. 한국에 와서도 오전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 18시간씩 일해서 한 달에 32만 원(500달러)을 받았지만 필리핀에서 빌린 돈 갚고, 이자 갚느라고 남는 게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미등록'이 되었어요."

 

-'미등록' 상태에선 어떻게 일하셨나요?

 

"장림의 다른 공장에서 필리핀 친구들과 공장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일했어요. '미등록'이라서 더 힘들었어요. 식품회사였는데 우리가 말을 안 들으면 사장은 경찰 부를 거라면서 협박도 했어요. 그래서 1년 안 된 그 회사를 나와서 김해로 옮겼어요. 옮긴 용접 회사는 사장이 괜찮았어요. 거기서 3년 정도 근무했어요.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다시 장림의 사출 공장으로 옮겨왔어요. 사출 공장에서 오래 있어서 7년간 있었어요. 사출 공장 사장은 정말 좋은 한국분이셨어요. 한국사람과 똑같이 월급, 보너스를 주셨어요. 그런데, 여기도 일이 없어지면서 다시 김해 사출 공장으로 옮겨 2년간 일했어요. 14년째 되던 해인 2007년 결혼을 하면서 처음으로 필리핀을 다녀오게 돼요. 결혼한 뒤론 영어강사 생활과 상담 일을 쭉 했고요."

 

 

영어 미사에서 한국여성 만나 결혼

4년 만에 한국 국적 취득 신청

'미등록' 노동자 전력에 불허 상태

이주민 돕다가 커미션 받는다 오해도

 

외국인 남성 배우자 한국어 공부 등

정부 다문화정책에서 철저히 소외

"돈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일 좋아"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1997년부터 영어 미사에 참가했어요. 필리핀 사람들은 가톨릭 신자가 많잖아요. 필리핀 공동체 대표를 하면서 영어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동갑내기 아내를 알게 됐어요. 8년간 연애했어요."

 

-그래도, 결혼이 고민은 되었을 것 같은데요.

 

"고민이었죠. '미등록'은 언제 단속 당할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사랑 때문에 결혼을 선택했어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결혼식은 필리핀에서 올렸어요."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리셨다고요? 출입국에 문제가 없으셨나요?

 

"사실, 겁났어요. 무엇보다 한국에서 나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주한필리핀대사관에 문의하니까 결혼비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출국을 강행했어요."

 

-13년 만의 고국 방문이었네요.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못 가 봤으니까요. 다행히 어머니는 건강하셨어요. 오히려 왜 더 빨리 결혼하지 않으셨냐고 하셨어요."

 

-현재 국적은 어떻게 돼 있나요?

 

"재작년에 한국 국적 취득 신청을 했어요. 국적취득시험에도 합격했고, 실제 결혼 여부 조사도 통과했는데 허가를 못 받았어요. 옛날에 '미등록'이라서 그랬나봐요. 6개월을 기다렸는데 안 나와서 국적취득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에요."

 

부산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의 든든한 맏형 데니 게라 씨.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여주자 부산BFC 사람들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들 그를 `데니 형`이라고 불렀다. `데니 형`의 웃음이 계속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도 필요해 보인다.

 

 

누가 보기에도 이젠 '당당한' 한국인일 것 같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대한민국 국민(배우자)과 혼인한 후 3년이 경과하고 혼인한 상태로 대한민국에 1년 이상 거주해야 하는 조건에다 국적취득시험도 통과했지만 그에게 한국 국적의 벽은 높았다. 현재는 '결혼이민(F-6)' 비자를 받아서 갱신 중이다.

 

 

-결혼이민자니까 패밀리 비자를 받게 된 거군요. 굳이 귀화 신청을 하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는 건 아닌가요?

 

"결혼이민 비자는 처음엔 1, 그 다음 번부터는 2년씩 연장해요. 언젠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그렇고 귀화 신청이 꼭 받아들여졌으면 좋겠어요."

 

-,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거죠?

 

"가족, 아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서 일하면 많은 필리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으니까 행복해요. 저도 13년 동안 '미등록'으로 있었고, 이주 노동자가 어떻게 힘들게 사는지 잘 알아요. 옛날에 이런 꿈이 있었어요. 만약에 비자를 받게 되면 할 수 있는 만큼 이주 노동자를 도와줘야겠다고요. 지금은 비자를 받았으니까 열심히 도와주고 있어요."

 

-이젠, 돈을 더 많이 버는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비자가 있으니까 어디서든 일할 수 있어요. 다른 직업 찾으면 괜찮은 월급도 받을 수 있어요. 영어강사 생활도 해 보았고, 테솔 자격증도 있기 때문에 학원에서 요청도 있어요. 하지만 아내한테 얘기했어요. 이만큼만 벌어도 되겠느냐고. 아내도 옛날부터 자원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저를 많이 이해해요. '네가 어디서 일하든지, 행복한 곳으로 가라. 돈을 많이 벌 수도 있겠지만 행복하지 않으면 하지 마라'고요."

 

-부인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지 아는 사람 같아요.

 

"우리 부부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인가를 많이 생각해요. 아내는 지난 1994년부터 지금까지 영어미사 활동(통역이나 미사 준비)을 하고 있어서 이주 노동자의 힘든 현실을 잘 알아요. 지금도 한밤이나 새벽에도 병원, 경찰서 같은 데서 통역이 필요하거나 다른 도움이 필요하다고 저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때마다 아내는 말해요. 얼른얼른 가라고, 그 사람들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요."

 

-부산BFC에선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요?

 

"사단법인 이주민과 함께 조직팀장으로 있다가 스태프로 파견됐어요. 이주 노동자들 상담을 주로 해요. 임금체불 상담이 가장 많고요, 근로조건, 산재, 사업장 이전, 보험연금, 신분증 압류, 폭행, 사망, 의료 등이 있어요."

 

-그나저나 필리핀 대사관에선 데니 씨한테 표창장이라도 줘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 자국민을 위해서 밤낮 없이 뛰어다니는데.

 

"'미등록'이긴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인권이잖아요. 한 번은 필리핀 이주 노동자 한 분이 영어미사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켰어요. 급하게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더니 뭐가 필요하냐는 거예요. 본국에 유해를 송환하는 데 경비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대사관 돈 없어요'라고 했어요. 그런 대사관이 어딨어요? 그래서 우리 필리핀 공동체 등에서 100만 원 정도 모금해서 알아서 해결했어요."

 

-대사관도 사정이 있었겠지만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데 대해 실망도 컸겠네요.

 

"그래도 지난 12월엔 필리핀 공동체 요청으로 필리핀대사관에서 '부산 출장 12일 영사업무'를 나오기도 했어요. 이주 노동자 중에도 한국에 오래 살다 보면 여권이 만료되기도 하고, 작년부터 허용된 이중국적에 따라 결혼이주여성들 상당수는 필리핀 국적을 회복했어요. 미등록 상태에서 아이를 출산한 분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 여권을 만들어줘야 본국으로 갈 수 있잖아요. 실제로 비자 여권 업무를 보신 분이 110여 명이나 되었어요."

 

-부산은 살 만한가요?

 

"부산은 '2의 고향'이에요. 음식, 날씨, 치안 다 좋아요. 처음 왔을 때 비하면 정말 많이 바뀌었죠. 1994, 1995년만 해도 시장에서 뭘 사면 불쌍해 보였는지 더 주기도 했어요. 지금은 안 그래요. 옛날엔 이런 적도 있었어요. 나이키 가게에 가서 '이것 얼마예요?' 하고 물어보면 다짜고짜 '그것 비싸요~'라고 해요. 몇 번이나 싸웠는지 몰라요. '아줌마, 제가 비싼지 안 비싼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가격이 얼만지 물어봤잖아요'라고 했어요. 가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런 건 별로 없어요."

 

-임금체불 문제는 아직 많다고 하셨죠.

 

"고용주는 몰라서 그랬다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거죠. '미등록' 체불도 고용노동청에 알아보면 대부분 해결이 잘돼요. 지난달엔 통영까지 가서 필리핀 이주 노동자의 밀린 임금과 퇴직금 800만 원을 받아줬어요. 근데, 근로감독관이 문제 있었어요. 그분이 저한테 이런 일 하면 커미션 얼마 받느냐며 반말도 하는데 정말 당혹스러웠어요. 나중에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화났어요."

 

 

부산BFC 이인경 센터장도 마무리 발언을 통해 현실을 꿰뚫었다.

 

"전국적으로 200개에 달하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지만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를 위한 것이라고 보면 돼요. , 일요일 문 여는 곳이 없으니까요. 그 말은 즉, 외국인 남성 배우자들은 한국어도 배울 수 없고, 혼자서 공부하든지, 엔지오센터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거죠. 외국인 남성 배우자들은 다문화정책에서 철저하게 소외돼 있어요. 여기 센터만 해도 처음엔 결혼이주여성들을 취업시키는 게 어떠냐는 말이 있었지만 이주 노동자 경험이 있는 활동가 중심으로 꾸려가고 있어요. 이주여성들은 통역은 가능하지만 노동자로서의 경험이 일천해 사업주와 부딪쳐 가면서 밀린 월급을 받아내고, 노동청에 찾아가 항의하는 게 익숙지 않거든요. 또 결혼한 이주여성들은 양육이나 출퇴근 면에서 여러가지 배려도 필요하다고 봐요."

 

데니 씨도 덧붙였다.

 

자기는 그런대로 한국말을 잘하지만 더 많은 이주남성들에겐 언어교육 지원과 문화 이해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젠가 데니 씨도 한국요리를 배우고 싶어서 전화했더니 여성만 된다고 해서 강습을 못 받았다며 웃었다.

 

그와의 만남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일과는 계속되고 있었다.

 

상담과 외부 출장 틈틈이 계속되는 연대활동.

 

그날도 '평등을 위한 이주민연대(SEMIK)' 월례회의가 열렸고, 곧이어 '전국이주민활동가대회 3차 준비회의'가 같은 장소에서 열려 방글라데시인 샤골, 미얀마인 또뚜야 등과 함께 전국에서 모여든 이주민 활동가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있는 데니 씨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또한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정규직, 비정규직, 여성, 이주자, 산재 , 장애인 노동자오늘날 노동자의 이름은 정말 많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임을.

 

데니 씨 파이팅!

 

=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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