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에 잘려진 손·잘려진 꿈 ‘23살의 피에타’

등록 : 2012.12.22 16:06 수정 : 2012.12.22 18:24

     
캄핌 데샤는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에 왔으나 악몽만 지닌 채 떠나게 됐다. 왼손을 묻은 땅, 한국에 그는 언젠가 여행하러 오고 싶다고 한다. 무지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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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온 지 2개월, 왼손 전체를 짓이긴 프레스 오작동 사고로 무너진 타이 이주노동자 캄핌 데샤의 꿈…한 손으로 데샤의 머리를 감겨준 한국인 산재 노동자, 그리고 지금도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

12월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한국의 이주민 현실을 알리는 ‘경계에 선 사람들’을 연재합니다. 경기 지역의 인권·노동·이주 단체들이 모인 ‘무지개’가 손이 잘린 이주노동자, 쫓겨난 결혼 이주여성,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주청소년을 인터뷰합니다. 이제는 괜찮아졌겠지 여기지만 여전히 열악한 노동조건과 차별적 인식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_편집자

노무사로 일하며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상담하러 온 이들이 풀어내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접하며 ‘이 나라는 노동자에게 혹독한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다. 그 생각은 한국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얼마 전 만난 캄핌 데샤, 23살 타이 청년에게도 이 나라는 참 모질었다. 상담 업무를 도와주는 수원이주민센터에서 이주노동자가 프레스 사고를 당해 손을 잘라냈다는 연락이 왔다.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경기도 안산에 있는 병원에 산재 상담을 하러 갔다. 병실에서는 체구가 작고 마른 이주노동자가 없어진 왼쪽 손에 감긴 붕대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그나마 한 손은 무사해 다행이라니

캄핌 데샤의 나이는 겨우 23살. 한 마을의 주민 200~300명 가운데 2~3명 정도만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을 가진 타이에서 데샤는 전문대까지 다닌 재원이었다. 타이에서도 자동차 부품 제작 및 기계 공작 기술자 팀장으로 일했다고 한다. 장남인 데샤는 동생들 교육비와 어머니 수술비 등으로 진 빚 1천만원을 갚고 타이에서 가전제품을 판매·설치하는 가게를 내겠다는 희망으로 지난 8월21일 한국에 왔다. 하지만 데샤가 꿈꾸는 희망은 잠시, 지난 10월15일 18시30분 그는 전구 주변의 갓을 만드는 프레스 작업을 하다가 왼쪽 손 전체가 프레스 기계에 으깨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한국말 한마디 못하는 타국에서의 외로움이 오죽했을까. 입원한 데샤는 사고 당시의 충격과 병원에서의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어린애처럼 보챘다. 생살이 잘려나간 고통, 늘상 쓰던 팔이 순식간에 사라진 허무함으로 그는 집과 부모님을 한없이 그리워했다. 그러나 산재 치료와 보상 문제가 남아 당장 떠날 수도 없었다.

데샤는 어머니에게 한동안 손이 절단된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전화 통화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손가락 2~3개가 잘린 거냐”고 물었다. 데샤가 어렵게 뗀 입으로 “한 손 전체가 없어졌어요”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어떻게 한국으로 떠난 지 한 달 만에 그렇게 됐느냐”며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데샤는 전구 빛을 아래로 모아내는 여러 종류의 갓(케이스)을 무게 200t의 프레스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이 프레스는 얇은 철판을 넣고 양쪽 손으로 버튼을 동시에 눌러야만 작동된다. 사람의 손이 오갈 때 작동되는 센서는 양옆에 세워져 있어야 하지만, 작업을 빠르게 하려고 늘 센서는 눕혀져 꺼진 상태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게 했다.

산재 발생 한 주 전에는 기계가 제대로 압착되지 않는 등 고장이 있어 데샤가 관리자에게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주말을 지나 월요일에 출근한 데샤는 기계가 잘 고쳐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일을 했다. 보통 얇은 철판을 안으로 밀어넣고 빼며 전구 갓을 찍어내는데, 철판을 이동시킬 때 두 손을 사용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프레스 작동 버튼을 두 손으로 누르기도 전에, 아니 버튼을 하나도 누르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프레스가 내려와 압착이 되었다. 데샤의 증언에 따르면, 보통 프레스가 한 번씩 작동되는데 사고 당시에는 기계가 오작동돼 데샤의 손을 여러 번 내리쳤고, 다른 직원들이 와서야 겨우 기계를 멈출 수 있었다.

배에 손가락을 심은 따뜻한 손

200t의 압력으로 프레스가 데샤의 왼손 전체를 계속 내리치는 악몽 같은 일이 벌어졌다. 데샤는 23년 동안 자기 몸의 일부라 느꼈던 손이 잘려진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는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주변에 흩뿌려진 피와 공포감에 머릿속이 뿌옇게 되는 느낌. 데샤는 그날의 사고를 설명하지 못했다. 데샤에겐 그날의 일이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틀거리던 손가락들이 없는 뭉뚝해진 왼손을 볼 때마다 그것은 악몽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두 손을 다 잃을 뻔했는데, 한 손만 잃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데샤. 그가 겪었던 악몽의 시간은 평생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고, 뭉뚝해진 손은 또 그 악몽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그에게 어찌 이 악몽을 깨게 해줄 수 있을까?

데샤의 병실에는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데샤와 비슷한 절단 재해로 입원해 있었다. 데샤는 한국말을 못해서 병원 생활이 힘들 것 같다고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국인 산재 노동자들이 데샤를 동생처럼 잘 대해주고 먹을 것도 많이 챙겨주었단다. 잘 챙겨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국말로 못해서 답답할 지경이라고 했다. 산재 사고로 손가락 2개에 살점이 떨어져나가 새살이 돋아나도록 배에다 손가락을 심어놓은 한국인 산재 노동자는, 한 손으로 데샤의 머리를 직접 감겨주기도 했다. 그는 늘 데샤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지만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데샤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프냐? 많이 아프지?’ 데샤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손을 잃게 한 한국이지만, 같은 병실에 있던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작업장에서 물건을 빨리 만들어내려고 사장들이 안전장치를 해제해놓는데, 이 때문에 수많은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해 손과 발을 잃고 있다. 데샤는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일했지만 무조건 빨리빨리 일하라고 재촉당했고, 회사는 노동자의 안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사고가 나기 전까지 정기검사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데샤는 “회사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보다는 일이 무조건 우선이었다”고 말했다. 데샤의 손 절단 사고가 난 이후, 회사는 안전시설 표지를 해놓고 센서도 작동되게 해놓았다. 하지만 데샤와 함께 일하던 친구는 자신도 언제 손이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채 지금도 일을 하고 있다.

언젠가 한국에서 여행하고 싶다

젊은 나이에 부푼 꿈을 품고 한국에 온 데샤. 하지만 그 꿈은 노동자의 살아 있는 육신과 건강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체제에 의해 잘려나갔다. 내년 2월쯤이면 데샤는 타이로 돌아간다. 그는 타이와 한국 정부가 자기 같은 이주노동자에게 일하게 될 공장의 안전에 대한 정보와 교육을 미리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거란다. 데샤의 잘려진 손과 잘려진 꿈. 데샤는 언젠가 한국에 꼭 오고 싶단다. 그때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자신의 왼손을 놓고 온 나라 한국으로 말이다.

김승섭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승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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