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에 구인업체 정보제공 막아
불법체류 내모는 ‘노동부 지침’

등록 : 2012.10.28 20:28 수정 : 2012.10.29 08:42

이직신청자 일자리 못구해 발동동
3개월 넘게 무직땐 강제추방 당해
“지침 즉각 폐기하라” 3000여명 서명

지난해 7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노동자 응엔(22)씨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다. ‘외국인근로자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은 석 달 동안 일하지 않은 이주노동자를 강제추방하도록 하고 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응엔씨는 강제추방당할 위기에 몰렸다. 지난 8월 바뀐 고용노동부의 내부지침 때문이다.(<한겨레> 7월18일치 12면)

응엔씨는 지난달 3일 다른 직원들과 사이가 나빠져 직장을 그만뒀다. 그 뒤로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새 직장을 찾지 못했다. 일자리를 찾으려 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다. 그저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과거에는 이주노동자가 사업장 변경 신청을 하면 노동부 산하 고용센터가 구인업체 목록을 제공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목록을 보고 직장에 직접 연락해 일자리를 구했다. 지난 8월 고용노동부의 내부지침이 바뀌었다.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이동이 잦고 취업과정에 브로커가 개입하는 폐해가 있다”는 이유로 구인업체 목록을 이주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을 중단했다. 대신 이주노동자 명단을 구인업체 쪽에만 제공하고 고용센터가 업체와 노동자를 중개하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직장을 알아보는 길은 막아버리고, 사용자가 이주노동자를 선별할 기회만 열어놓은 셈이다. 이에 따라 이주노동자의 선택권은 크게 줄고 피해도 빈발하고 있다. 고용센터는 응엔에게 경북 왜관에 있는 한 회사를 소개해줬다. 그러나 택시비 8만원을 들여 찾아간 회사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 고용센터가 소개한 다른 회사의 채용담당자도 “사람을 뽑지 않는다”고 말을 바꿨다.

7개월 전 방글라데시에서 온 알리(25)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슬람 신자인 알리는 종교 문제로 한국 직원들과 갈등을 빚다 두 달 전 사업장 변경 신청을 했다.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알리에게 고용센터가 소개해 준 곳은 가구공장 등 전혀 다른 업종들뿐이었다. 두 달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알리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한국에 계속 머물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갈지 선택해야 한다.

2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열린 ‘사업장 변경 권리 박탈 피해사례 증언대회’에 나선 이주노동자들은 “노동부의 내부지침은 불법체류자를 양산하는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 7월부터 진행된 노동부 지침 폐지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에는 3000명이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신분 노출을 꺼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서명운동에 참여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영섭 사회진보연대 노동위원장은 “이번 지침이 브로커로부터 이주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라고 노동부는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을 막아 강제노동을 일상화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김기돈 한국이주인권센터 사무국장도 “노동부 지침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빨리 취직하라는 협박”이라며 “노동자들이 실제로 느끼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노예노동 강요하는 고용노동부 지침 철회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다음달 11일 서울 중구 대한문 앞에서 노동부 지침 폐기를 위한 이주노동자 결의대회를 열 계획이다.

허승 정환봉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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