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명여권으로 입국한 중국동포 1만 명 ‘도망자’ 전락

[중앙일보] 입력 2012.08.18 00:47 / 수정 2012.08.18 10:07

채널 15 JTBC 스페셜 - 2011년 외국인 체류 심사 강화 이후

중국동포 1만여 명이 강제출국의 공포 속에 ‘도망자’로 지내고 있다. 최근 서울 대림동 일대에서는 이를 해결해 주겠다는 여행사들의 입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


#1. 2007년 한국 남자와 결혼해 4살 난 아들이 있는 중국동포 박모(39·여)씨는 요즘 가족들과 생이별해 중국으로 쫓겨나는 악몽 속에 살고 있다. 최근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행정 절차를 밟던 중 과거 불법 체류했던 사실 때문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박씨는 한국에 온 뒤 유치원에서 일해 왔다. 그러나 갑자기 불거진 체류 자격 문제로 유치원에서 나와야만 했다. 이후 낯선 사람이나 차량만 봐도 가슴이 철렁하는 공황장애 증세까지 보이는 등 심각한 상태다.

 #2. 폐결핵을 앓고 있는 아들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2007년 한국에 온 중국동포 최모(58·여)씨는 요즘 오도 가도 못하는 불법체류자 신분이 돼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6월 비자가 만료돼 일단 중국으로 출국한 뒤 나중에 재입국해야 하는데, 과거 경기도 수원에서 불법 체류하다 쫓겨났던 경력 때문에 한국에 다시 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하고 있는 최씨는 “그동안 번 돈은 한국에 오기 위해 썼던 경비로 거의 다 써버려 아들 치료비를 마련하려면 일을 더 해야 한다”며 “이제 아픈 아들 얼굴도 못 보고 언제까지 숨어 지내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중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국에서도 숨어 지내야 하는 ‘도망자’ 신세의 중국동포가 급증하고 있다. JTBC가 지난 10일 보도한 사례들이다. 이들을 암흑의 삶으로 몰아넣은 건 바로 ‘위명(僞名)여권’, 즉 다른 사람의 이름 등을 빌려 만든 여권이다. 물론 이는 명백한 불법 행위다. 하지만 과거 중국동포들의 ‘한국행 러시’가 이어질 때 까다로운 체류조건을 채우기 힘든 동포들이 중국인 이름 등을 빌려 여권을 만든 뒤 한국에 들어오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적발되면 강제 출국을 당하곤 했다.

 좁기만 했던 중국동포의 ‘한국행 관문’은 2005년 정부가 중국동포의 체류 허가 범위를 넓혀주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과거 위명여권을 사용했던 동포들도 자신의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어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동포 사회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 건 지난해 7월 정부가 국내 입국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지문등록제와 안면 인식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체류 관련 심사를 대폭 강화하면서부터다.

 과거 위명여권 사용 경력 등이 족쇄가 되면서 올 들어서만 1500명이 넘는 중국동포가 입국을 거부당했다. 위명여권 사용이 드러나 출국 명령을 받는 사례도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07년 정부가 방문취업제도를 시행하면서 몰려온 동포들이 올해 대거 비자가 만료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현재 한국에 있는 중국동포는 약 46만 명. 제주도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이 중 위명여권의 족쇄를 달고 있는 중국동포가 얼마나 될지는 파악이 어려운 상태다.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대표는 “2007년 정부가 방문취업제도를 시행하기 전 한국에 들어왔던 중국동포 30만 명 중 상당수가 위명여권과 관련이 있다”며 “그때는 위명여권으로 들어오는 게 만연해 합법적으로 한국에 못 들어오면 거의 브로커를 통해 위명여권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중국동포 사회에 강제 출국 공포가 몰아닥치면서 이들을 노린 불법 업자들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국동포들이 모여 사는 서울 대림동 일대엔 요즘 새로운 광고들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위명여권 입국, 불법기록 있으신 분 특별 상담’ ‘위명 불법체류자 선착순 상담’ 등. 위명여권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 현장이다.

 JTBC 취재진이 과거에 위명여권을 쓴 적이 있는 중국동포와 동행해 한 곳을 찾아가 상담을 받아봤다. 여행사 직원은 “입국 규제된 것을 없앨 수 있다”며 “출입국사무소에서 지워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구한 비용은 1000만원. 중국동포에겐 1년 이상 일해야 모을 수 있는 큰돈이다. 또 다른 업소를 들어가봤다. 역시 비슷한 제안을 한다. 여기선 “어차피 불법으로 해야 되는 상황이라 정상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출입국사무소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풀어주기도 한다”는 얘기까지 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출입국사무소 관계자는 “전산에 남아있는 출입국 기록을 지우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동포들은 이런 업자들의 제안을 덥석 문다. 여행사 앞에서 만난 한 중국동포는 “위명여권을 해결해주는 대가로 500만원을 선입금하라고 해서 돈을 부쳤는데 연락이 안 돼 다시 찾아왔더니 도망가고 없다”며 울상을 지었다. 전형적인 ‘떴다방’ 형태의 사기다.

 모든 사기가 그렇듯 중국동포들을 노리는 불법 행위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한다. 요즘엔 방문취업비자가 만료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체류기간이 지났어도 중국에 돌아가지 않게끔 기록을 위조해준다는 ‘특별 패키지 상품’이 1500만원에 제시되기도 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방문취업비자가 만료돼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포는 약 7만2000명이며 내년에는 8만4000명에 달한다.

 이들은 일단 중국으로 돌아간 뒤 1년이 지나 다시 비자를 신청해야 재입국할 수 있다. 하지만 위명여권을 사용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출입국 과정에서 적발돼 다시는 한국 땅을 밟기 어렵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에서 돈을 모아 미래를 준비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암시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위명여권 경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박모씨는 “여행사에서 700만원을 내면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며 “지금으로선 그 방법밖에 없어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려 한다”고 털어놨다. 결국 상당수의 중국동포가 택하는 길은 ‘대책 없는 불법 체류’다. 정부 당국은 위명여권 문제 때문에 불법 체류를 택한 중국동포가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중국동포 관련 단체들은 과거에 위명여권이 관행처럼 횡행했던 만큼 한국에서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성실하게 일해온 동포들에겐 구제 기회를 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중국동포 단체 관계자는 “중국 행정의 허술함 때문에 이름이나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돼 본의 아니게 위명여권 소지자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밝혔다. 곽재석 이주동포정책연구소 소장은 “예전엔 중국동포들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했던 출입국 정책이 다시 묶여지는 등 종잡을 수가 없다”며 “방문취업제로 현저히 줄었던 불법 체류가 출입국 심사 강화 이후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이런 현실을 고려해 대책을 고심 중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방문취업비자가 올해 만료되는 중국동포들이 상당히 많은데 이 중 신분 세탁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불안이 가중되면서 각종 루머가 돌고 있다”며 “이들이 불법 체류자로 남을 우려가 있어 신고센터 운영 등의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오랜 세월을 방황해야 했던 중국동포들. 또 한번 찾아온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대거 불법 체류자로 전락할 위기 속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