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월셋방에서 숨진채 발견
“11년 한국살이 폐질환 앓아도
치료비·단속 무서워 병원 못가”
몸만 겨우 누일 수 있는 3평짜리 지하방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그의 머리맡에는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사진 속 아내와 아들에게 돈을 부치고 받았을 송금장 두 장이 접혀 있었다. 9월2일에 40만원, 10월2일에 80만원을 보냈다. 11월2일에는 부치지 못했던 걸까. 그의 지갑에는 현금 100만원이 꽂혀 있었다.
외롭기만 했을 11년간의 한국 생활, 46년간의 고된 삶을 마감하며 그가 남긴 것은 이뿐이었다. 필리핀 미등록(불법체류) 이주노동자 나랏 윌리엄 바리안(46)은 지난 3일 저녁 빛 한줄기 들어오지 않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의 다세대주택 지하 창고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도봉경찰서 관계자는 “나랏이 평소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유서도 없었고 주검에서 외상이 발견되지 않아 갑자기 병사한 것으로 추정돼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나랏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월세 16만원을 받기 위해 찾았던 집주인이었다. 그는 “(나랏이) 한달에 150만원을 벌어 100만원 정도를 고향으로 보냈다고 들었다”며 “월세를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내면서도 가끔 방에 가면 혼자 식빵 한 조각을 먹고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웃 주민 김아무개(42)씨도 “밤에 나가 아침에 들어오는, 인사를 잘하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그가 비좁은 지하방에서 그나마 빛을 볼 수 있었던 높이 50㎝짜리 창문을 막아둔 것도 밤새 일한 뒤 낮에 잠을 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랏은 2000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됐다. 2004년에는 한국에서 필리핀인 아내를 만나 아들을 낳고 아내와 아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최근에는 양말공장에서 밤새 일해 번 돈을 다달이 가족에게 부쳤다. 나랏이 살던 동네는 원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러나 2년 전 법무부의 집중단속으로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
나랏과 알고 지냈던 한 필리핀인(경기도 오산 거주)은 “나랏이 2004년부터 폐가 좋지 않았는데 건강보험이 없어 치료비도 많이 들고, 괜히 밖에 나갔다가 단속돼 추방 당할까 봐 병원도 제대로 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 때문에 한국에 살고 있는 사촌형과도 왕래가 잦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산 이주노동자센터의 장창원 목사도 “더운 나라에서 온데다 노동강도가 워낙 세 심장병, 고혈압 환자들이 많다”며 “이주노동자 센터나 모임에 나오면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데 단속이 무서워 피해다니다 보면 이렇게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나랏의 주검은 서울 도봉병원에 안치됐다가 장 목사의 도움으로 한국에 살고 있는 사촌형에게 인계돼 조만간 가족 품으로 보내질 예정이다.
김효진 박태우 기자 jul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