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데 취직시켜 줄게"…돈 뜯기고 불법 체류자 전락

 
입력: 2012-05-18 17:15 / 수정: 2012
뉴스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
취업알선 브로커에 멍드는 10만 '코리안 드리머'

브로커 통한 이직 '불법'
대부분 수수료 챙기고 '먹튀'…고용센터 통해 일터 바꿔야

고용주 인력 뺏겨 '발 동동'
갑작스런 이직에 피해 속출…불법체류자 고용 '악순환'

정부 '고용관리' 구멍
인력수급난에 불법 판쳐…고용부 "보고받은 바 없다"

공장 밀집지역인 인천 고잔동 남동공단의 한 공장에서 18일 외국인 노동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수도권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1년째 일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인 A씨(34)는 지난 1월 고용노동부의 통역 자원봉사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B씨(44)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B씨는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150만원)에 근무 강도는 훨씬 덜한 일자리를 소개해주겠다”고 꼬드겼다. A씨는 B씨가 정부에서 나온 자원봉사자라는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공장을 옮겼다.

새 직장, 도금공장의 업무는 고됐다. 근무 시간이 하루 10시간에서 최대 14시간으로 늘었다. 월급도 바로 옆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한국 동료보다 적었다. 그러던 중 A씨는 월급 170만원에서 매달 20만원이 B씨에게로 넘어가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의정부 외국인력지원센터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리저리 수소문한 결과 B씨의 정체도 밝혀졌다. 그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외국인력 알선 브로커’였다. 그는 인력이 부족한 중소 규모 공장이나 건설현장 등에 외국인 근로자를 소개해주고 업주와 외국인 근로자에게서 각각 10만~30만원의 수수료를 챙겼다. 류지호 의정부 외국인력지원센터 팀장은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소개해준다’며 접근하는 브로커들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코리안 드림’을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한 취업 알선 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잔업 수당까지 합쳐 월 150만원을 받기도 힘든 게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이지만 ‘어글리 코리안’에 속아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씩 떼이고,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이 브로커에게 속아 일터를 쉽게 옮기면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거나 농·어업에 종사하는 국내 고용주들도 피해를 입고 있다. 어렵사리 구한 일손이 갑자기 빠져나가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이다.

◆“더 좋은 데 취직시켜 줄게”…은밀한 제안

취업 알선 브로커들은 정부의 관리 소홀을 틈타 활개를 치고 있다. 취업 알선 브로커들은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스스로를 ‘정부에서 나온 통역 자원봉사자’나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이라고 속이고 더 나은 근무 조건과 월급을 미끼로 이직을 권유한다. 때로는 고용주들이 모르게끔 철저히 외국어로 대화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고용부 산하 고용센터를 통해 근무지를 바꿔야 한다. 브로커를 통한 이직은 명백한 불법이다.

더구나 대다수의 브로커가 수수료만 챙기고 ‘먹튀’를 일삼는다. 취업 알선의 피해자인 몽골 출신 울지 졸몬 씨(36)는 “약속한 조건과 전혀 맞지 않는 열악한 환경의 일자리가 대부분”이라며 “이미 수수료를 주고 새 일을 시작했을 때 브로커는 종적을 감춰버린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계약기간이 1년이나 남아 이직을 할 수 없었지만 이직을 허락해주는 대가로 고용주에게 150만원을 줬다. 브로커에게 준 수수료 30만원을 합쳐 모두 180만원을 날렸다.

브로커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어에 서투르고, 국내 사정에 밝지 못한 점을 이용한다. 고용센터를 통하지 않고 이직하는 게 불법인 걸 외국인 노동자들도 알고 있어 사기를 당하더라도 경찰이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할 수도 없다.

권오현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사무처장은 “근무처를 이동하려면 고용센터에 신고하는 등 서류작업을 해야 하는데 (브로커들이) 이런 작업을 했다고 속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이직시키는 바람에 어느 날 갑자기 불법체류자 신세가 되는 사례도 많이 접수된다”고 안타까워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은 17만421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16만9931명)에 비해 13% 늘었다. 국내 외국인 체류자 141만8926명의 12.3%로, 10명당 1명이 불법체류자다.

외국인 10만명, 브로커 통해 직장 구해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일하려면 고용허가제를 통해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받거나 조선족이 주로 이용하는 방문취업비자(H-2)를 받아야 한다. 보통 영세한 중소기업이나 농어촌 지역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E-9을 받는다. 이 비자로 18만5464명(3월 말 기준)이 국내에서 일한다. 이들은 최대 4년10개월 동안 국내에 머물 수 있고, 고용주와 협의가 되면 근무지를 다섯 번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업장 변경을 신청하는 건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2008년 6만여건에서 지난해에는 7만5000여건으로 25%가량 증가했다. 한 해 동안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18만5464명) 10명 중 4명이 사업자 변경을 신청한 셈이다. 이 과정에 브로커들이 접근하는 것이다.

의정부 외국인력지원센터에서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상담을 하고 있는 페르자 씨(32)는 “브로커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의 전화번호를 입수해 이직을 알선해주겠다고 수시로 문자를 보낸다”며 “외국인 노동자 절반 이상이 이런 방식으로 직장을 구한다”고 말했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와 있는 외국 인력은 모두 23만3000여명(불법 체류자 포함). 이 중 10만명 이상이 브로커를 통해 직장을 구하는 불법 인력시장이 형성된 셈이다.

브로커의 불법취업 알선은 고용주의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경기 여주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김영혼 씨(58)는 “지난해 모내기철에 함께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가 다른 데로 옮기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모내기 시기를 완전히 놓쳤고 피해도 컸다”고 말했다. 경기 김포의 콘크리트 제품 생산업체 K사장은 지난 5월부터 한 달 동안 태국인 불법체류자 12명을 고용하다 적발돼 징역 5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갑자기 빠져나간 인력을 보충하려고 브로커로부터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게 화근이었다.

서울 구로동에서 인력사무소를 운영하는 김모씨(43)는 “합법 체류 외국인을 고용하기 위해선 최소 두 달을 기다려야 하고, 4대 보험을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불법체류 노동자를 쓰는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적신호 켜진 ‘외국인 고용관리’

브로커를 통한 외국인 불법취업이 성행하지만 정작 감독 당국은 이러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고용부와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그런 브로커가 있다면 우리가 다 알 텐데 아직 보고받은 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경찰 역시 외국인 노동자의 피해 신고가 없다며 손을 놓고 있다. 경기경찰청 관계자는 “보통 이런 브로커들은 지인이나 외국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선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명확한 단서를 잡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작년부터 고용허가제 기간 만료 대상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을 떠나지 않고 있어 불법 체류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E-9비자가 만료되는 외국 인력은 6만7111명에 달한다.

정부는 고용 허가 쿼터를 통해 업종별, 국가별 인력 수급을 조절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브로커가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는 물론 불법 체류자까지 취업 알선에 나서면서 음성적인 구직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취업을 위해 한국에 머무르는 외국인 전부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상시 통제하고, 전국 72개 고용센터에서 일자리를 일일이 소개해주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 고용허가제

국내에서 취업을 희망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국내 근로자와 동등한 대우를 보장해주는 제도. 인력 도입을 하기로 한 베트남 등 15개 국가 출신 노동자의 신분을 보장하고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발급해준다. 우리나라는 2004년 8월부터 시행했다. 계약 기간 안에 근무지를 변경하려면 고용주의 허락을 받고 관할 고용센터에 신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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