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하루 15시간 노예처럼…사장님 무기는 “나가라”
등록 : 20111005 21:02 | 수정 : 20111006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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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축산업 외국인 고용허가제의 그늘
    일할 곳도 노동조건도 계약서는 ‘휴지조각’
    여권 뺏기고 외출금지 욕설·폭행에 결국 탈출
    농한기 다가왔는데…이대로 쫓겨나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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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원도 양구에서 일하다 도망치거나 쫓겨나온 캄보디아 농업 이주노동자들이 지난달 6일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이주민 영상교육센터에 모여 당시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지구인의 정류장 제공
    “니들 집에 가! 캄보디아로 가!”

    지난 8월14일 늦은 밤, 강원도 양구군의 한 호박농장 사장은 “(계약서에 쓰여 있는) 원래 사장님한테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마디(가명·22·여)와 나라(가명·25·여)를 향해 성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농축산업 외국인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와 5개월 넘게 일한 이들은 8월 초순께 다른 캄보디아 친구한테서 ‘근로계약서상의 사장이 아닌 사람 밑에서 일하면 불법이라서 추방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같은 요구를 해왔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 이틀 전엔 사장이 마디와 나라에게 망치를 흔들며 “그냥 우리 집에서 일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이번엔 농장에서 내몰았다.

    다음날 새벽, 농장에 딸린 방에서 먹고 자던 이들은 두 손에 여행가방을 들고 농장을 나섰다. 당장 머물 곳이 없어 캄보디아 친구들이 있다는 경기도 안산으로 가기로 했다. 경찰이나 출입국사무소 직원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아는 캄보디아 친구가 데리러 올 때까지 4시간을 농장 근처 교회에 숨어 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버스를 타고 강원도 홍천을 거쳐 꼬박 7시간 만에 경기도 안산에 있는 이주민 영상교육센터인 ‘지구인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지난달 29일 찾아간 센터에는 마디와 나라 말고도 올해 3월15일과 22일 한국에 와 양구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노동자 8명이 더 있었다. 이들 역시 마디와 나라처럼, 애초 계약 조건과 다른 가혹한 노동여건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다 못해 양구의 농장에서 도망쳐 나오거나, 해고돼 이곳을 찾아왔다. 이들을 포함해 양구에서 일하다 센터로 온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는 18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새벽 5~6시께 사장과 함께 일터에 나가 저녁 7~8시까지 난생처음 보는 호박·감자·고추·상추·사과 등을 키웠다고 했다.

    지난 2월 캄보디아에서 서명한 근로계약서에는 월 220시간 노동(이틀 휴일)에 법정 최저임금 수준인 97만여원을 받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달에 보통 300~390시간 일하고 월급은 100만원씩만 받았다. 18명의 노동자가 13명의 사장에게 못 받은 연장근로수당 등을 다 합치면 1500만원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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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3월 강원도 양구의 한 농장에서 캄보디아 농업 이주노동자 메키라(가명·19·여)가 수레로 비료 포대를 나르고 있다. 메키라가 입고 있는 작업복에는 캄보디아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메키라 제공
    익숙하지 않은 한국말과 낯선 작업환경 때문에 이들은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사장들은 ‘완벽한 일꾼’을 원했다. 5개월 동안 모두 4명의 사장 밑에서 일한 르티(가명·26)는 “실수를 할 때마다 사장님은 늘 내게 ‘게으름 피운다’고 화를 내며 욕을 했다”며 “한번은 고무밧줄로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쏘피읍(가명·22·여)은 “저녁 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사장이 자꾸 함께 밥을 먹자고 했는데 거절하자 소주병을 던지며 화를 내고 욕을 했다”고 털어놨다. 삐싸이(가명·36·여)도 “쉬는 날 읍내에서 열리는 장에 혼자 나갔다가 사장에게 엄청나게 혼났다”며 “결국 쉬는 날도 숙소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힘든 작업조건과 비인간적인 대우보다 이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강제추방에 대한 공포였다. 이들의 ‘매니저’라고 자칭한 양구의 ㅍ영농조합법인 안아무개(47·여) 본부장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주노동자들을 근로계약서상의 사업장이 아닌 다른 곳에 보내 일을 시키고 여권까지 관리했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과 출입국관리법을 보면, 이주노동자가 근로계약을 맺은 사업장이 아닌 곳에서 일할 경우 비자가 취소돼 추방당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지난 7월부터 8월 중순까지 계약서상의 사업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고용주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노동자가 산업인력공단에 신고해 현장점검까지 나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공단에서 점검을 나온다는 소식을 들은 안 본부장이 공단 점검 당일 노동자들을 모두 계약서상 사장의 집으로 보내 일을 하게 했고, 이들은 그다음날 곧바로 애초 일하던 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들 18명은 지난 8월 중순 ‘지구인의 정류장’의 도움으로 강원고용노동지청에 연장근로수당 지급과 사업장 변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냈다. 이들 가운데 8명은 체불임금 일부를 돌려받고 사업장을 옮기기도 했지만,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10명은 날씨가 쌀쌀해지자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농한기가 되면 일자리가 줄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괜찮으니 법과 계약대로 일할 수 있는 농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캄보디아인들에겐 난생처음 맞는 한국의 ‘겨울’이 두렵기만 하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차라리 공장이 낫다?

    등록 : 20111005 21:01 | 수정 : 20111006 1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