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라집, 한국 생활 수기
라집
기사 게재일 : 2015-06-29 07:00:00
▲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라집(가운데) 씨와 그에게 도움으 줬던 류인근(왼쪽) 씨와 바수무쿨 유니버설문화원 원장.
-“한국엔 두 종류의 회사가 있다
-좋은 회사와 안좋은 회사...
-나는 안좋은 회사서 괴로웠다”

 2014년,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 라집 씨(28살)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그는 지금까지 1년여 동안 머문 한국에서 여러가지 핍박을 당했고, 이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본보는 광주에서 라집 씨를 돌봤던 유니버설문화원의 도움으로 이주노동자가 한국에서 당했던 고난과 현재 심경을 그가 직접 작성한 글로 전한다. 이글엔 여전히 이주노동자에게 가혹한 한국 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편집자주>


 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라집(28)이다. 내 인생사, 작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겠다. 어머니 쿠쿠 비스와스는 순박하고 마음이 아주 깨끗하신 분이다. 교육을 많이 받진 못하셨다. 아버지 바블루 비스와스는 어머니보다 교육을 조금 더 받으셨다. 두 분의 고향은 같은 추와단가 지역이다. 두 분은 매우 사랑했고, 사랑을 통해 행복한 삶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두 분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시댁에서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인도로 가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다.

 나에겐 누나와 남동생이 있다. 누나가 태어났을 땐 우리 집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그나마 나와 동생이 태어났을 땐 곤궁함을 벗어났다. 이렇게 나는 누나, 동생과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방글라데시서 태어나 인도서 성장

 

 어느 날 외할머니가 인도로 여행을 왔다. 외할머니는 우리집에서 한 달을 지내고나서 어머니에게 “라집을 며칠 데려갔다가 다시 보내겠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외할머니 뜻에 동의해서, 우리는 외할머니를 따라 방글라데시에 갔다.

 우리집은 행복했고 형편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가구 장사를 했다. 다양한 소파와 침대, 의자를 판매했다. 하지만 어느날 부모님에게 어려움이 닥쳐왔다. 아버지는 우리를 방글라데시에 둔 채 인도로 돌아갔다.

 방글라데시에서 작은 외삼촌과 같이 살기 시작했다. 작은 외삼촌은 소득이 많지 않았어도 우리를 거둬줬다. 그 분이 우리 곁에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

 나는 작은 외삼촌과 같이 생활하며 작은 외삼촌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공부도 했다. 외삼촌은 우리에게 잘해줬지만 외숙모는 우릴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잘해주지 않았다.

 외숙모는 여러모로 우리를 인도로 돌려보내려 애썼다. 어머니는 결국 누나와 남동생을 다시 데리고 인도로 돌아갔다.

 나는 외삼촌 가게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누나를 결혼시켰다. 우리 집엔 더 이상 누나를 교육시킬 여력이 없었다.

 나는 누나를 위해 아무 것도 못했다. 어머니와 동생은 아주 어렵게 생활했고, 외숙모의 잘못에 대해서도 외삼촌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어머니처럼 모든 아픈 것을 마음속에 담고 살았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더 이상 공부할 수 있는 복은 없었다.

 

 10년 동안 가정 살림살이 책임져

 

 외삼촌 가게에서 일하던 어느 날 아람당가 지역의 몰라 모터스 사장이 나를 보자 했다. 사장은 내가 손님에게 말하는 걸 보고, 위층에서 내려와 외삼촌에게 말했다. 나는 3개월 수습 후 회사 매니저급까지 올라갔다. 그리고나서 나는 메헤푸르 구에 있는 모터바이크 전시장에 배정됐다. 그곳에 집을 하나 얻어 엄마와 동생을 불러 같이 행복하게 살았다.

 이렇게 10년 동안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없는 동안 어머니가 고생하던 모습을 뼈저리게 보아왔다. 그렇게 어머니를 고생시킨 아버지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프고 일할 수 없다는 얘기를 누군가의 전화를 통해 들었다. 나는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런 어머니가 아버지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이제 우리 가족은 인도에 있는 누나를 제외하고,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 나 네 식구가 살게 됐다. 나는 매니저로서 6년간 돈을 벌어 우리 가정을 이끌어갔다. 아버지는 아프고 어머니도 아팠지만 그렇게 가정을 이끌어왔다.

 남동생은 대학을 다녔다. 내가 교육비를 대주어야 했다. 누나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 있어 가끔 도움을 줘야 했다. 그런데다가 내가 같이 살았던 외삼촌 가족도 사업이 잘 안 돌아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줘야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기쁘게 대해 왔다. 나는 항상 하느님에게 “나에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왔다.

 

 “더 큰 미래를 위해” 한국으로

 

 그러던 중 친구가 한국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내가 돈을 버는 식으론 가정을 행복하게 지킬 수는 있어도, 미래를 위해 저금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일하러 가서 돈을 크게 벌어 미래를 준비하자고 결심했다.

 친구에게서 정보를 얻고 난 후, 한국말을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공부하던 도중에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200점 중에서 120점을 받아 1차로 뽑혔고 시험에도 붙었다. 이력서와 신체 능력 시험, 인터뷰로 이뤄진 3차 시험에서도 300점 중 245점을 받아 붙었다.

 1차 시험에선 90,000명 중에서 3,600명이 뽑혔다. 2차 시험에선 그중에서 400명이 뽑혔다. 3차 시험에선 그중에서 280명이 1차로 선발됐다. 나는 그렇게 선발되어 1년 정도 한국에 가기 위한 과정을 밟았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한국에는 좋은 회사도 있고 나쁜 회사도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좋은 회사로 갈 수 있기를 계속 기도했다. 한국에 오기 전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한국에 와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엔 새로운 시련과 몸부림이 시작됐다.

 괴롭힘 당하는 삶이 시작됐다.

 2014년 4월 인천공항에 도착 후 교육장으로 이동해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3일 뒤 세 명이 함께 공장에 도착했다. 공장에 도착한 날부터 일할 것이라 교육받았지만, 우린 일주일 후부터 일을 시작했다. 오자마자 일주일동안 일이 없다며 일을 안 시키는 것을 보며, 서로 얘기했다. “우리가 안 좋은 회사에 들어왔나 봐.”

 

 한 달동안 계속 맞고 욕 먹어

 

 부장님이 나를 너무 괴롭혀서 후회하기 시작했다. 왜 내가 한국에 왔는지.

 아무 때나 욕하고 아주 나쁜 말을 사용해가면서, 이런 욕 듣고… 아무 때나 협박하고 때리려하는 모습 때문에 밤에 들어오면 겁이 나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나는 처음 들어온 사람인데, 한 번도 나한테 제대로 일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그래도 못 하거나 잘못했을 때마다 욕을 했다.

 2개월 지나고 나선 욕으로 안 되어 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욕먹고 맞아가면서도 아버지가 아프고 어머니가 아프고 동생이 학교 다니고 있고, 외삼촌 가족과 내 누나의 가족을 생각해서 다 참았다. 그런데 월급조차 내가 일했던 시간대로 제대로 안 나오니 문제였다.

 인도에 있는 누나나 방글라데시에 있는 온 가족, 외삼촌의 가족까지 여기서 생활비를 보내주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는 점점 더 심하게 나를 괴롭히고 때렸다. 돈도 제대로 못 받았다. 한국에 오기 전에 쓴 근로계약서와 달랐다.

 한 달 동안은 계속 맞고 욕먹었다. 너무나 슬펐다. 혼자 울었다. 밤에 한 달 동안 잠이 안 왔다. 항상 기도했고, 내가 왜 이런 데 와있나 하고 하느님을 원망했다. 그런던 중에 광주 유네스코의 바수 무쿨과 연락을 하게 됐다.

 이분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하느님은 직접 아무것도 안 하지만, 누구를 통해 자신의 일을 시키는데 바수 무쿨이 그런 사람인 것 같다. 이 분을 내가 못 만났으면 그 공장에서 걱정하다 심장병에 걸려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느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회사가 나의 돈을 지금 안 주고 있고, 돈을 안 보내고 있어서 온 가족이 굶고 있었다. 나는 유니버설문화원에 들어와서 돈도 안 벌고, 먹고 자고 신세를 졌고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돈도 못 벌고 남의 신세를 받으며 살기까지 하지만, 나한테 기대고 있는 다른 식구들의 삶은 엉망으로 되어버린다.

 

 좋은 이들의 도움…돈 벌 수 있었으면

 

 많은 이들이 꿈을 꾸고 한국에 왔다 물론 한국은 아주 좋은 나라고 좋은 사람도 많아 내가 잊지 못할 것이지만, 내가 공장에 있는 동안 한국 사람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밖에 나와서 보니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바수 무쿨을 같이 돕고 있는 한국 분 중에서 `인근’이란 형님은 너무 정으로 우리를 대해줬다. 말로 할 수 없는 정도로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고 그래서 나는 한국을 사랑하게 됐고,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됐다.

 지금은 우리 온 가족 식구들이 내가 돈 벌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많은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내 문제가 해결되고 빨리 내가 돈을 벌 수 있도록 기원해줬으면 좋겠다.

 지금 엄마 아빠 아프기 때문에 아빠 일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생활이 어렵다. 어머니, 아버지가 아파서 치료비용도 못 보내고 있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빨리 일을 구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무쿨 형님이 여기에 있는 동안에 함께 무쿨 형님을 돕고 있는 모든 주변 사람들이 너무 잘 해주고 그래서 이런 사람들 위해서도 이런 사람들이 잘 되도록 여러분이 기도해줬으면 좋겠다.

라집<이주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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