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라이프] “난 특별한 사람”… 차별·편견 딛고 패션계 아이콘으로

국내 첫 흑인계 패션모델 한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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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28 10:35:41      수정 : 2017-10-28 11:20:27
지난 19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2018 S/S 헤라서울패션위크’. 화려한 옷을 입고 무대를 오가는 모델들은 단숨에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두운 색상의 옷과 진주 목걸이를 착용했고 190㎝의 큰 키는 이날 출연한 20여명의 모델들 사이에서도 도드라졌다. 무엇보다 까만 피부색으로 주목을 받았다. 국내 처음의 흑인계 패션모델 한현민(17)군이었다. 

패션쇼 무대 위에 선 한현민군의 모습은 17살의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당당함을 뿜어낸다. 
사진=SF 엔터테인먼트 제공
“흑인 모델도 세계 패션무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꿈을 실현하면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요.”

당당한 아우라를 뿜으며 걸었던 무대를 내려오자 현민군은 여느 10대와 다름없이 앳된 말투와 표정으로 쑥스러운 듯 말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한군의 꿈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현민군의 인기는 국내외에서 하루하루 상한가를 치고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어한 4만8000여명 중 절반 이상이 해외팬이다. 화보 촬영이나 패션위크로 해외에 나가면 택시나 지하철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가보지 못한, 아버지의 나라 나이지리아에서도 현민군의 인기가 높다. 

“어느 순간 알아봐주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홍대거리에 놀러가거나 촬영으로 해외에 머무를 때 사람들이 ‘한현민이다’라고 하면 정말 신기하고 감사해요.”

인기가 높아지니 자연스럽게 불러주는 곳이 많아졌다. 올해에만 화보촬영과 업체 미팅, 패션위크 등으로 영국 런던, 미국 LA와 뉴욕, 이탈리아 밀라노,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 홍콩과 대만을 찾았다. 올 하반기에 무대에 선 횟수만 20차례가 넘는다. 반기로 이뤄지는 한 시즌에 20차례 넘게 패션위크에 참가한 건 모델 업계에서 ‘기록적인 일’이다.

모델 말고도 다양한 업계에서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단편영화를 촬영했고 CF도 찍었다. 그를 모티브로 한 연극과 소설도 제작될 예정이다. 해외 언론에서도 관심이 높다. 지난 7월 영국 BBC에서 현민군을 보도했고, 같은 방송국에서 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촬영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AFP통신이 현민군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했다. 지난해 3월에 데뷔한 이후 불과 1년 반 만에 이룬 성과다.

까만 피부와 신체적 조건은 차별화의 포인트가 돼 대중들의 시선을 끌어모았고, 그것이 ‘모델 한현민’의 빠른 성공을 이끈 토대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민군의 소속사인 SF 엔터테인먼트 윤범 대표는 “팔과 다리가 길고 무엇보다 다른 모델이 가질 수 없는 유니크한 매력이 있어 발탁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흑인을 유독 깔보고, 무시하는 일부의 저속한 시선으로 인해 현민군이 겪어야 했던 차별은 컸고 앞으로 극복해야 할 편견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태어난 현민군은 한국에서 성장하며 어릴 적부터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자신의 모습이 한국 아이들과 다르다고 처음 느낀 것은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였다. 유치원에서 친구와 친해질 만하면 그 친구는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라며 말하고는 멀어지는 일이 반복됐다. 초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일들 때문에 큰 상처가 생겼지만 도망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자 다문화 학교가 아닌 일반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나름대로 투수와 3루수 포지션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어요. 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운동을 포기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학교 선배가 모델이 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됐어요. 패션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온라인 의류 쇼핑몰에서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모델 업계에 처음 받을 내디뎠을 때도 어려움은 많았다. 쇼핑몰 피팅 모델로 일하면서 시급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해외 모델 오디션을 보게 해 주겠다”는 말에 속아 프로필 사진 촬영비만 내고 돌려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평소 어머니가 그에게 격려하며 했던 말은 큰 힘이 됐다. 

“현민아, 넌 특별한 사람이란다.”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묻자 현민군은 거침없이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틴 루서 킹 목사를 꼽았다. 킹 목사를 존경하는 이유는 차별과 편견에 맞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차별의 경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들였던 힘겨운 노력이 반영된 생각일 것이다.

“어렸을 때 킹 목사를 다룬 책을 봤어요. 흑인 차별에 맞서는 모습이 큰 감명으로 다가왔어요. 아시잖아요, 아직도 흑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과 생각이 존재한다는 거…. 모델 업계만 봐도 흑인 모델은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드물어요. ‘흑인이 옷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편견이 많다랄까요. 하지만 모델은 결국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지 인종으로 승부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백인이나 황인이나 흑인 각자의 매력이 있고 어울리는 옷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동하고 싶어하는 것도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세계 무대에서 흑인 모델로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예를 들어 이들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등의 일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나이지리아에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나이지리아는 현재 내전 중이라고 들었죠. 전쟁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싶어요.”

그의 이런 바람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가장 사랑하는 한국 사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분명했다.

“당연히 편견 없는 사회예요. 어떤 사람이든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지난 19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국내 최초의 흑인 모델 한현민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흑인 모델도 세계 패션무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이제원 기자
당찬 포부와 희망을 가진 현민군이지만 무대 위에 서지 않을 때는 여느 고등학생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시험을 망쳤다고 투털대고 촬영이 없는 날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거나 함께 밥을 먹고 피시방에 간다. 친구와 게임, 영화,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다. 특히 책읽기를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책은 ‘해리포터 시리즈’예요. 올해 런던에 갔을 때 소설의 배경이 되는 런던 ‘킹스크로스역’에 가봤어요. 영화보다 소설책을 보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요. 영화는 원작에 비해 편집이 많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적잖아요. 하지만 책은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고 깊게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아요.”

해외 무대에 서면 영화 해리포터에 출연한 배우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현민군은 크게 웃었다. 헤르미온느 역을 맡았던 배우 엠마 왓슨을 꼭 보고 싶다고 말하며 쑥스러워하기도 했다. 

야무진 꿈을 꾸고 있는 현민군이 넘어야 할 과제가 있다. 바로 영어다. 영어가 서툴러 해외 무대에 설 때 무척 아쉬웠다고 한다. 영어 공부에 대한 열의를 다지며 하는 말에도 그는 모델로서의 당찬 포부를 빠뜨리지 않았다. 

“올해 유럽에 다녀왔을 때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한국에 돌아오면서 후회하고 영어를 열심히 배우기로 다짐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잖아요. 이해를 해야 패션에서도 더 자신을 표현할 수 있고요.”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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