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外노동자·이주민 곳곳서 '차별' 한숨

'세계인종차별 철폐의 날' 맞아 "자성·사회통합" 목소리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지난해 7월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들어와 경기도 파주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베트남 출신 레칵탄(35)씨는 3개월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낯선 타국에서 가족을 생각하며 외로움을 누르고 열심히 일했지만, 사장은 작년 12월부터 월급을 주지 않고 있다. 3개월 넘게 받지 못한 임금은 총 423만2천355원.

베트남에 있는 가족에게 매달 생활비를 송금해야 하는 레칵탄씨에겐 큰돈이다. 그는 요즘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간다.

사장은 작년 10∼11월에도 임금을 제때 주지 않았다. 당시 주위 베트남인들의 도움을 받아 고용노동청에 신고한 뒤에야 사장은 밀린 월급을 나눠서 줬다.

반복된 임금체불로 다시 고용노동청을 드나드는는 레칵탄씨는 "노동청에서는 사장이 밀린 임금을 4개월에 걸쳐 나눠서 주겠다고 하니 그렇게 하자고 설득하는데, 나는 사장 말을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탄씨는 "같이 일하는 다른 베트남 사람 1명과 태국 사람 2명도 나랑 똑같은 상황"이라며 "사장이 한국 직원들에게는 월급을 제때 다 주면서 우리한테는 주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이달 13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가 개최한 UN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50주년 기념 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인종차별 금지 법제화 이행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1일 유엔이 정한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연합뉴스 기자에게 레칵탄씨 사연을 들려주던 원옥금 재한베트남공동체 대표는 "레칵탄씨가 한국인이라도 저런 대우를 받았을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원 대표 역시 베트남 출신 여성으로 1998년 귀화한 결혼이주민이다. 그는 "이 사례 말고도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외국인노동자와 이주민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노동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 다른 일터로 옮기려 해도 고용주의 사인을 받지 않으면 사업장을 바꿀 수 없게 한 현행 제도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원 대표는 "임금체불뿐 아니라 '일을 잘 못한다'면서 사장이 외국인노동자를 폭행했다는 사례가 아직도 보고된다"며 "인종과 피부색 등을 이유로 생활 속에서 차별받고 불편한 시선을 느끼는 경우도 여전하다"고 전했다.

다문화·이주민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많이 나아졌지만,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거나 '코리안 드림'을 품고 입국한 외국인들은 아직도 억울한 대우를 받고 차별을 겪는 일이 많다고 토로한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등을 이유로 차별을 당했다며 진정한 사건이 모두 37건 접수됐다.

인권위 관계자는 "체류자격이 불안한 외국인이라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수사기관에 고소·고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리 인권위라도 해결을 호소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런 그늘에 가려진 사례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레칵탄씨의 사례처럼 일터에서의 불이익과 차별은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꼽힌다.

경기도외국인인권지원센터가 도내 17개국 출신 외국인 주민 560명을 설문조사해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 절반가량이 일터에서 차별을 당했다고 답했다.

일터에서 '차별이 매우 심하다'는 응답은 13.0%, '차별이 약간 심하다'는 답은 30.7%로 전체의 43.7%가 일터에서 차별을 느꼈다고 했다.

이는 거리나 동네에서 차별을 느꼈다는 응답(26.4%)의 1.7배, 공공기관(18.8%), 상점·음식점(18%), 외국인지원단체(15%)에서 차별을 느꼈다는 답의 2∼3배에 달하는 수치여서 일터에서의 차별이 심각한 수준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실태는 이달 14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조사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가부가 작년 9∼11월 성인 4천명과 청소년 3천640명을 대상으로 벌인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인의 다문화 수용성 지수는 100점 만점에 53.95점으로 간신히 낙제점을 면했다.

이 지수는 문화개방성·고정관념 및 차별·세계시민행동 등 8개 구성요소별 점수를 종합해 산출했다. 4년 전과 비교하면 이주민을 거부·회피하는 정서나 고정관념은 약해졌지만, 일방적인 동화에 대한 기대는 더 높아진 것으로 분석됐다.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를 이웃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응답이 31.8%로 미국(13.7%), 호주(10.6%), 스웨덴(3.5%) 등보다 크게 높았다.

'일자리가 귀할 때 자국민을 우선 고용해야 한다'는 비율도 60.4%로 미국(50.5%), 독일(41.5%), 호주(51.0%)보다 높았다.

결혼이주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인권침해 문제는 수년 전까지 사회의 주목을 받으며 나아지는 것으로 보고되지만, 최근엔 이주아동 인권 문제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인권위가 작년 7∼10월 진행한 '이주아동 발달권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이주아동들은 학업과 학교생활, 또래 집단과 가족 등과의 관계에서 차별 등 다양한 문제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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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지난해 5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세계인의 날 기념 '이주아동에게 차별없는 세상을' 행사에서 지구촌학교 다문화합창단 어린이들이 합창하는 모습.

나이에 맞춰 고교에 입학하려 했지만 학교에서 이주아동이라는 이유로 거부해 중학교 3학년으로 학령을 낮춰 입학한 사례, 피부가 검다며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사례, 태권도를 익혔지만 무국적 상태라며 승품 심사에 참여할 자격을 박탈당한 사례 등이 보고됐다.

우리나라가 초고속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경제활동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이주민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소극적인 외국인·다문화 정책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통합 정책'이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높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이미 이주민 2세들이 군에 입대하거나 제대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시대가 됐다"며 "사회 양극화 등에 따른 상실과 책임을 이주민에게 돌리는 등 일각의 차별적인 시각을 바로잡고,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사회통합을 위한 정부와 시민사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dk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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