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이주 아동들 “꿈마저도 달아났어요”… 멍든 동심
  • 입력:2013.04.05 17:33


“아이들이 놀릴 때면 때려주고 싶어요. 때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참는 거예요. 그러면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요.” 서울의 초등학교 3학년 은지(가명·9·여)는 자기한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 어른들이 참 이상하다고 했다. 엄마는 필리핀에서 왔지만 은지는 필리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주변의 도움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이들도 장난삼아 “신고한다”고 놀리곤 한다. 은지가 미등록 이주아동, 불법체류 상태란 게 같은 반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국인이주노동자 인권을 위한 모임의 석원정 소장은 ‘13자리 신분번호’가 없다는 이유로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학교에서, 생활에서 하루 수십 번씩 장벽에 부닥친다고 했다.

“요즘 교육은 상당 부분 인터넷으로 이뤄지는데 주민번호나 외국인번호가 없으면 교육사이트 접근 자체가 안 돼요.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수학여행갈 때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면 미등록 아이는 포기합니다. 번호가 없으면 은행계좌를 못 만들잖아요. 그래서 급식비, 장학금 지원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어요.”

하다못해 친구들과 컴퓨터 게임을 하려 해도 번호가 필요하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한다 해도 대학 진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수능시험은 볼 수 있는데 대학 등록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지 못한다.

아산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우삼열 소장은 “친구들 사이에 미등록이란 사실이 알려져 ‘신고한다’는 농담만 들어도 아이들은 불안해한다”며 “(불법체류자) 정기 단속이 있다는 소문만 돌아도 집 밖에 나가지 못해 학교를 빠지기도 일쑤”라고 말했다.

실제 당국에 적발돼 아이만 홀로 추방된 사례도 있다. 지난해 10월 몽골로 강제 출국된 민우(17·당시 고1)는 친구들의 싸움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다가 미등록 상태임이 밝혀져 사흘 만에 출국 조치됐다.

10년 전 부모를 따라 한국에 온 그는 학교 성적도 좋고 대기업에서 고교 3년간 장학금을 받기로 약속도 돼 있었다. 미등록이란 이유로 경찰서에서 출입국관리소로 옮겨가며 지냈던 72시간 동안 부모는 신변이 노출될까봐 아들의 얼굴 한번 제대로 대면하지 못했다. 현지에 머물 곳도 마련하지 못한 채 부모와 떨어져 혼자 몽골로 추방됐다.

현재 먼 친척의 도움으로 몽골 학교에 다닌다. 몽골에 간 지 6개월쯤 됐지만 여전히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 몽골 친구들은 ‘한국 애’라며 오히려 거부감을 보인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은 10일 국회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실태와 개선방안 토론회’에서 공개하려고 민우의 육성을 녹음해 왔다. 민우는 “한동안 한국 친구들과 놀던 꿈만 꿨다. 10년간 한국어로 공부하다 이제 몽골 문자를 배우려니 너무 어렵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 고등학교만이라도 졸업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서울신학대 보육학과 황옥경 교수는 “우리나라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돼 있다. 이 협약을 따른다면 수갑을 채워 강제 추방된 민우군 같은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이 이 땅에서 최적의 출발을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다.

한국은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유엔은 우리 정부에 여러 차례 이주아동의 권리를 보장토록 권고했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 “부모의 법적 지위나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의 출생등록과 동등한 교육 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촉구했고, 유엔인종차별철폐협약위원회도 지난해 8월 “난민, 인도적 지위 체류자, 난민 신청자, 미등록 이주민 자녀의 출생을 적절히 등록할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이주아동 청소년 권리보장을 위한 시민행동이 민주통합당 박영선 의원 등과 상반기 발의할 예정인 이주아동 권리보장법안은 미등록 이주아동의 교육권, 의료권과 보육서비스를 지원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교육권의 경우 해당 지역에 거주 사실을 입증하는 서류만으로 국내 학교에 입학 또는 전학할 수 있게 했다. 학교장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주아동의 입학·전학을 거부할 수 없도록 못 박았다. 적절한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필수예방접종이나 의료급여 등에 관한 내용도 담겼다.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받을 권리도 포함됐다. 모두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다.

이런 제도가 불법체류자를 양산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국가 차원의 이주정책, 다문화 정책과도 맞물려 있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문제다. 그러나 인권 전문가들은 적어도 아동의 교육권·의료권·보육권은 정책의 문제가 아닌, 필수적 기본권이라고 반박한다.

석 소장은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돈을 벌어 고국에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여기서 아주 정착하려는 이들은 별로 없다”며 “미등록 이주아동은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어서 교육권이 확충된다 해서 불법체류가 늘 리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 김미선 이사는 “한순간 국가의 결정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학령기 아이들을 학교가 품지 않으면 그들이 어디로 갈지 생각해야 한다. 미등록 아이들의 교육권을 보장하는 건 불만세력을 줄이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김미나 기자, 박세환 박요진 박은애 수습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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